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9일

동, 서독 첫 정상회담 개최

산풀내음 2017. 1. 15. 18:57

1970 3 19,

, 서독 첫 정상회담 개최

 

동서독으로 분단 당시 양국은 7차례의 공식 정상회담과 6차례의 비공식 정상접촉이 있었으며, 공식회담 가운데 4차례 회담은 베를린장벽 개방 이전에 있었고 3차례는 베를린장벽 개방 이후 동독정권의 붕괴과정이 시작된 후 개최된 회담이다.

 

1969 10 28일 브란트 총리는 취임연설에서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두 국가는 단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며 소위 ‘2국가론을 제기했다. 이는 기존의 외교원칙인할슈타인 독트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이란 서독발터 할슈타인1955에 내세운 외교 원칙으로, 서독만이 독일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승인하거나 동독과 수교하는 국가와는 관계를 설정하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Willy Brandt (18 December 1913 8 October 1992)

Walter Hallstein (17 November 1901 – 29 March 1982)

 

브란트의 제의는 기민당(CDU) 정부의 친서방 정책과 공산권에 대한 강경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소련 및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데 목적을 둔 것이며 브란트가 새로이 추진한 신동방정책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나 야당은 반통일노선, 분단 고착화, 매국행위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한편 서독과의 접촉을 체제 위협 요소로 생각한 동독의 울브리히트 정부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과 중국의 접근에 위협을 느낀 소련은 유럽의 긴장완화 및 2차 대전 후 설정된 새로운 국경선에 대한 국제적 인정 확보 등을 위해 서독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련의 의도를 간파한 브란트 총리는 1969 7월 측근인 에곤 바(Egon Bahr) 총리실 차관을 모스크바에 파견, 모스크바 조약 체결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함으로써 동서독 정상회담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침내 1970 3 19일 제2차 대전 후 상호 적대시해 온 동서독이 동독국경의 소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9년 동서독 국가탄생 이래 첫 정상회담으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을 방문했다.

 

1970 3 19일 동·서독 정상 회담을 위해 동독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왼쪽)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이날 오전 7 45분 브란트 일행을 태우고 서독의 본을 출발한 열차는 11시간 45분 만에 국경에 위치한 게어스퉁겐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동독 기관차로 교체한 뒤 에르푸르트를 향했다. 브란트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회담은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약 6시간에 걸쳐 진행됐으나 양측의 견해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결국 구체적인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2차 회담을 5 21일 서독 카셀에서 갖는 것으로 결론짓고 회담을 마무리 지었다.

 

 

회담장소가 에르푸르트와 카셀로 결정된 것은 서독국민의 86%가 베를린 이외 장소에서의 회담개최를 반대했으나 동독의 거부로 불가능하게 되자, 양국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에르푸르트와 카셀이 선정되었다. 동서독 간의 정상회담에서 절차문제 등 사소한 부수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주최 측의 방식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절차문제로 회담이 난항을 겪는 일은 없었다. 예를 들어 동독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서는 협상 테이블에 양국 국기를 비치했으나 서독 개최 시에는 국기를 배치하지 않았다.

 

또 제1차 회담 시 에르푸르트 역 청사에는 "서독연방군을 때려 부수자"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2차 카셀회담 시에는 회담장 밖에서 서독 극우단체와 극좌단체 간에 충돌이 발생, 극우단체 요원들이 동독 국기를 훼손하고 동독대표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서로가 이를 문제시하지 않아 정상회담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1·2차 정상회담은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가운데 소련의 종용에 따라 개최됨으로써 서로 간의 견해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후 70여 차례의 실무접촉을 거쳐 1972 12 21일 서로를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한다는 기본조약을 체결한 양측은 1973 9월 유엔 동시가입과 1974 3월 상주대표부 개설로 서로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첫 회담 이후 20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