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1일

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타계

산풀내음 2017. 1. 17. 20:53

2001 3 21,

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타계

 

 

정주영(鄭周永, 1915 11월 25 ~ 2001 3월 21) 현대그룹 창업자 겸 전 명예회장이 2001 3 21일 오후 10시 서울중앙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6세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 이 구절은 그의 인생관을 잘 축약한 것이다. 정주영씨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큰 족적을 남긴 시대의 거목이었다.

 

정주영은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으며, 막노동으로 출발하여 한국 최대의 재벌이 된 인물이다. 1937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1940년대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5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8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영웅시대》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1998 6월 16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 활동으로는 1992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 총선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해 12제14 대선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1.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주영은 1915 11월 25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6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통천 송전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이다.

 

육 남매 중 장남이었던 정주영은 10살부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농사일로 하루 종일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내심이대로라면 농사꾼으로 늙어 죽겠구나라는 생각에 농사꾼의 삶을 못마땅해 했고,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한다.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2. 쌀가게 주인으로

 

1933으로 19살의 나이로 다시 고향을 떠났고 이것이 4번째 가출이었다.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불안한 막일꾼 일이 후회되어 경성으로 상경하였고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쌀 한 가마니도 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세끼 식사를 주는 조건하에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집을 나온 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장부를 잘 쓸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정주영 회장은당시 주인아저씨는 돈은 많아도 배운 게 없어서 장부를 쓸 줄을 몰랐고, 잡기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만 적어놓으면 아들이 저녁에 와서 거래처별로 대충 옮겨 적고 재고 파악만 하는 정도였다 “6개월쯤 되었을 때 주인아저씨가 아들을 제치고 나한테 장부 정리를 맡겼다. 그만큼 나를 신임한다는 뜻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1938년 그의 나이 23살 때 가게를 물려 받았고, 정주영은 가게 이름을 경일상회로 바꾸고 인근 학교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어 나갔다. 당시 경일상회의 수익은 꽤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1940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제가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등 쌀 배급제를 실시하자 경일상회도 문을 닫게 된다.

 

 

3. 변중석 여사와의 인연

 

일제강점기인 1935 11월 23 밤 변중석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4. 자동차·건설업의 시작 현대의 태동

 

막일과, 쌀가게 일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정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돈도 배경도 거의 없었던 젊은 청년이 일생을 걸 만한 일은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이 일하던 쌀가게의 단골손님이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 공장의 직공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시를 받았고, 정주영은 이곳 저곳 빚을 내아도서비스를 계약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를 세우는 초석이었다.

 

자동차 수리라고는 전혀 모르던 정주영은 직공들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악착같이 배웠고, 일감도 계속해서 밀려들어 대박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자동차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였지만 신설동에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세운 정주영은 다른 공장보다 수리기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다른 곳보다 수리가 빠르다는 소문이 곧장 퍼졌고, 공장에 고장난 차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아도서비스 공장은 밀려드는 일감으로 바쁘게 돌아가며 돈도 꽤 많이 벌어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가 1940년 본격적인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에 사용할 물자비축과 인력을 징발하는데 혈안이 됐다. 이 때문에 군소 기업체들을 합치는 기업 정리령에 휘말려 아도서비스는 1943년 서울 종로에 있던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합병 당해 공장을 잃고 마는 비운을 당했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수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고.

 

1947년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내부에현대토건사를 세워 건설업도 시작했다.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건설업이었지만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고, 1950년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반년 후 6·25동란이 터졌고 또다시 아수라장이 됐다. 전쟁의 와중에 회사는 소용이 없었고, 정주영과 그의 가족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현대그룹의 토대가 된 현대건설은 6·25 이후 복구 사업을 통해 큰돈을 벌게 된다. 1954년부터 미국 원조 자금을 재원으로 전쟁 복구공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고, 막대한 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이를 감수하면서 낙동강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 지어 준 성과로 신용도 쌓아 그 후 한강 인도교 공사 등 정부 발주 공사 수주를 쉽게 할 수 있는 결과가 주어졌다. 이런 와중에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 고령교 공사(1954)의 일화

 

우여곡절 끝에 현대가 수주한 공사의 시한은 24개월. 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교각은 기초만 남아 있을 뿐, 무너진 상부 구조물은 그대로 강물에 처박혀 있어 말이 복구공사지 되레 신축 공사가 더 수월할 판이었다.

 

물살이 빨라 착공 후 1년이 지났지만 아직 교각 하나도 제대로 박아 넣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착공 때 700환으로 책정한 기름 단가가 2,300환으로 급등했다. 이 와중에 1953년 수주한 조폐공사 관련 공사가 7,000만환의 막대한 적자를 내고 완공됐다.

 

회사 재정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미군 공사로 번 돈을 조폐공사에 다 쓸어 넣은 꼴이었다. 일당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사무실은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다.

 

눈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그는 고령교 어떻게든 공사를 완공시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게 쌀가게 배달원 시절부터 뼛속 깊이 박힌 정주영의 믿음이었다.

 

정주영은 친·인척들과 동업자들의 집을 팔아 추가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고령교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55 5월 악몽의 고령교가 완공됐다. 약속했던 24개월 완공 기일을 두 달 가량 넘긴 시점이었다. 계약 금액이 5,478만환이었는데, 적자가 6,500만환이었다. 2년 동안 이루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자기돈 6,500만환을 고스란히 털어먹은 꼴이다.

 

적자라고 봐줄 빚쟁이들이 아니었다. 자기 돈 내놓으라는 빚쟁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경쟁업자들은 “소학교 밖에 안 나온 친구라 공사기간이 2년이나 되는 장기 공사를 수주하면서 인플레 계산을 빼고 일괄계약을 한 것이 실수”라고 빈정댔다.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로 진 빚을 갚는 데만 20년이 걸렸다. 수업료 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인플레가 이렇게 심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건설 현장에서 장비의 중요성도 절실하게 깨달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57년 정부는 한강 인도교 공사를 발주하기로 했다. 당시 내무장관은 조흥토건에 공사를 주려했고, 공사 승인권을 가진 재무장관은 흥화공작소에 주려고 했다. 두 기업간 치열한 경쟁이 1년 이상 계속되자 정부는 결국 경쟁입찰에 부치게 됐다. 당시 흥화공작소는 시내에서 한강까지의 택시요금(4천원)도 안되는 단돈 1천원에 응찰하면서 기부공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응찰했던 모든 건설업체들이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입찰서를 뜯은 내무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 의사가 없는 것 같고, 기부공사는 받을 수 없다’고 공식 발언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응찰 가격 두 번째였던 현대건설로 자동 낙찰이 되었다. 조흥토건-흥화공작소의 싸움 덕택에 ‘어부지리’로 공사를 따냈지만, 고령교 공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었더라면 현대건설에 돌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에서 40%의 이익을 거두었고, 고령교 공사의 악몽에서 벗어나 ‘5대건설사’로 뛰어오르게 됐다.

 

 

 

5. 현대건설의 성장

 

현대건설을 주축으로 우리나라 건설 현장에서 입지를 굳힌 정주영은 해외 진출을 생각하게 되었고, 1965년 태국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현대건설이 수주한 것은, 비록 적자를 보긴 했지만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획기적인 전기로 받아들여진다.

 

1966년 현대건설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 공사에 참여, 태국 고속도로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던 전쟁지역에서 현대건설은 1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 지었고, 월남에서의 준설 공사 경험은 1970년대 중반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해서 대규모 준설업자로 성장, 발전하게 한 초석이 되었다. 1967년 정부가 소양강의 상류를 막아 대규모의 댐을 건설하기로 하고 입찰에 부쳤고, 현대건설이 낙찰됐지만, 이도 쉽지 않았다. 댐 건설 현장인 오지까지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주변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해서 사력(砂礫) 댐으로 만드는 것이 콘크리트 중력 댐보다 훨씬 경제적이라 생각해 곧바로 설계를 바꿨다. 당시 수많은 이들에게 무모하다는 핍박까지 들으며사력댐은 실패할 것이라 지적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북한의 폭격이 콘크리트 댐을 깨트린다면 무너지지만 홍수에만 잘 대처하면 사력 댐이 더 유리하다는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결국 소양강 다목적 댐은 정주영이 제시한 대안으로 바뀌어 30% 가까운 예산을 절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소양강댐 건설 (1967.4-1973.12)

 

또한 경부고속도로 건설(1968.2.1~1970.7.7)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사였다. 정주영은 이 고속도로 건설의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로 참여를 했다.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오산까지의 105킬로미터, 대전에서 옥천까지의 28킬로미터를 합쳐 전 구간의 5분의 2만을 담당했지만, 경부고속도로 전체가 완공되기까지 그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 2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 서산 간척지의 신화, 일명 정주영 공법

 

80년 초 정주영 명예회장은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착수 했다. 서산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워낙 커 20만톤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학계와 선진국 건설사에 컨설팅을 의뢰해도 방법이 없었다. 최신 장비도 소용없었다. 도저히 불가능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6km방조제공사 중 270m를 못 막아 전체공정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데 모두들 안되다는 의견만 낼 뿐 이었다. 정주영회장은 한마디를 건넨다. “임자, 해보기는 했어

 

 

이때 정주영 명예회장은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 방안을 강구하다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으면 바위덩어리 외에도 흙이나 버력 등 현장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도 물막이를 할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간척지 최종 물 막이 공사는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사이며, 설사 인력으로 해결이 된다고 해도 그 엄청난 비용이 문제다" 라고 말하며 "밀물과 썰물의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해서는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물줄기를 차단 내지 감속시킨 다음 일시에 토사를 대량 투하하면 제방과 제방 사이를 막을 수 있다" 고 현대의 간부진들에게 제안했다.

 

유조선 공법에 대한 실행 가능성을 현대의 기술진들이 면밀히 분석한 후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자 정주영 명예회장은 1984 2 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최종 물 막이 공사를 진두 지휘했다.

 

그래서 이 '유조선 공법'을 일명 '정주용 공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공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계획공기 45개월을 35개월이나 단축, 9개월 만에 공사를 완공시킴으로써 총 공사비를 2 8십억 원이나 절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행정구역은 충산 서산시, 홍성군, 태안군이 함께하고, 총 간척면적은 4,611만평, 총 답()면적 3,062만평. 한반도 지형이 바뀐 대단한 공사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창안한 "유조선 공법"은 그 후 미국의 '뉴스위크' '뉴욕타임즈'에 소개되었고, 런던 템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수행한 세계적 철구조물 회사인 랜달팔머 & 트리튼 사가 유조선 공법에 대한 문의를 해오는 등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6. 현대조선소(중공업)의 탄생

 

젊은 시절 쌀가게로 첫 사업을 시작해, 현대건설로 주목 받기 시작한 정주영에게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세우는 꿈도 있었다. 위험부담은 크지만 조선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업종이었다. 현대건설은 종합 건설사로서 기계나 전기 계통의 기술자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을 활용해 배를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은 정주영이었다.

 

그러나 조선소 건설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당시 국내 외환 사정은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 정주영 회장 혼자의 뚝심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자금이 너무나 많이 필요했다. 사업계획서는 만들어졌지만 아직 한 번도 배를 만들어보지 못한 대한민국으로선 선박 컨설턴트들에겐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였다.

 

1971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 9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수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한 보고서에도 ‘NO’를 외치던 롱바텀 회장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고 창의력을 발휘하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이 정주영의 현대조선소 건설이었다.

 

1974 6 26만톤급 유조선 어클랜틱바론 1,2호를 건조. 육영수 여사가 진수식에 참석하여 테잎을 끊었다.

 

 

7. 현대자동차의 성장

 

이후 현대는중동 붐을 일으키며 오일 달러를 벌어들였고, 정주영 회장의 오랜 꿈이었던 자동차 사업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 1976년 마침내 최초의 국산 모델인 포니를 개발, 1986년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 차를 수출하는 등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 의하여 1967 포드와 합작 회사로 처음 세워졌으나, 이후 포드와 결별하고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의 기술 협력을 받아 대한민국 최초 자체 모델인 포니를 생산하게 되었다. 포니는 대한민국 생산 자동차중 최초로 캐나다에 수출되었지만 미국으로는 배기가스 규제에 걸려 수출되지 못하였다. 이 후에 현대는 엑셀을 생산하여 미국에 수출하게 된다.

 

1998 10월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였다. 2000 9월 현대그룹에 있는 다른 계열사 9개를 가지고 현대그룹에서 독립하여 현재의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었고 정몽구가 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그룹과 분리되어 전혀 다른 기업 집단이다. 2000년 이후로는 준중형 세단인 아반떼, 중형 세단인 쏘나타 등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내수 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현대차의 자체 최초 모델은 베스트셀러인 '포니'. 1976년 출시됐죠. 포니는 198450만대를 넘었고 국내 최초로 캐나다에 수출

 

 

8. 정계 입문

 

현대그룹은 수평, 수직 확장을 해나가게 된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전자·중화학·금융업 등 거의 모든 업종에도 진출해 현대그룹을 성장시켰다. 1977년부터 한국 재계를 이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5번 연임하기도 한 그는 1987년 현대그룹 회장직을 동생인 정세영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정주형 회장은 자수성가 형 기업가이지만 정부 통치아래 가장 시달린 기업인으로도 통한다. 정치 현실이 경제인들을 괴롭혔고, 기업은 위축되는 사례가 많았다. 정주영이 대통령 후보에 출마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도 경제인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아픔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여진다.

 

현대그룹의 명예회장인 정주영제14 대선 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1992년 1에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해 2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정식으로 통일국민당이 창당되었다.

 

1992년 3에 실시된 제14 총선에서 지역구 24, 전국구 7명으로 31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며 김영삼과의 충돌 끝에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박철언김복동, 유수호 등이 입당하였다. 정주영은 이를 바탕으로 제14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정주영의 대선 낙선 후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 등의 혐의로 정주영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정주영1993년 2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1994박찬종신정치개혁당과 합당을 의결하여 신민당을 창당하며 통일국민당은 해산하였다.

 



 

 

9. 방북과 금강산개발

 

그러나 김대중이 제15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 2월 25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 6월 16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 501마리를 가져갔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10. 아산 정주영 회장의 어록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부정적인 의견을 접할 때마다 "해보기나 했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했던 정회장의 삶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

01. 운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운이 나빠지는 거야.

02.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지.

03. 무슨 일이든 확신 90%와 자신감 10%로 밀고 나가는 거야.

04. 사업은 망해도 괜찮아, 신용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야

05. 나는 젊었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났어. 더 많이 일하려고

06. 나는 그저 부유한 노동자에 불과해.

07. 위대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야, 노동자를 무시하면 안 돼.

08. 고정관념이 멍청이를 만드는 거야.

09. 성패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에 달린 거야.

10. 아무라도 신념에 노력을 더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거야.

11. 내 이름으로 일하면 책임 전가를 못하지.

12.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좋은 일을 해야지.

13. 더 바쁠수록 더 일할수록 더 힘이 나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인가 봐.

14. 열심히 아끼고 모으면 큰 부자는 몰라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어.

15. 불가능하다고? 해보기는 했어?

16.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시련이지 실패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