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 미국인 스티븐슨 사살

산풀내음 2017. 1. 21. 07:38

1908 3 23,

전명운, 장인환 의사, 미국인 스티븐슨 사살

 

1906년부터 미국에서는 일본인 노동자 배척, 일본인 학생의 공립학교 취학 거부 등 반일운동이 점증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양국 관계는 미일전쟁설이 유럽까지 유포될 정도의 악화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에서는 1907 11월 「일본인 이민 금지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에서는 미국 내 반일감정을 무마시키고, 나아가 일본인 이민 금지법안의 통과를 무산시킬 목적으로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 1851 2월 1 ~ 19083월 25)를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스티븐스는 주미 일본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에서 일본의 국익을 실현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특히 러일전쟁 중 일제가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자행하게 되자,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 등 한국 식민지화 조약을 체결하게 하는데 공헌한 일제의 앞잡이였다.

 

스티븐스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부터 신문 기자들에게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떠들었으며 1908 3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서는 다시 신문 기자들과의 회견 자리에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게 된 후로 한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 많기에 근래에는 양 국민들의 사이가 점점 친밀해지며, 한국에서 새 정부를 조직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본을 반대하지만 지방 농민과 각처 인민들은 전일과 같이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일본인을 환영한다는 등의 망언을 하였다.

 

3 22일 최유섭,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 공립협회 소속 4명이 스티븐스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그가 한 망언에 대하여 나무라고 잘못을 정정하라고 요구하였는데 오히려 스티븐스는 그들에게 무례한 태도로 “한국에는 충신 이완용이 있고 또 이등 통감이 있으니 한국과 동양의 행복이다. 내가 한국 형편을 보면 태황제는 너무도 실덕이 많고 완고한 관원들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으며,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이 뺏지 않았으면 일찌감치 러시아에게 병탄되었을 것이다. 내가 일본의 정책을 찬양하여 신문에 게재한 것은 사실 그대로이니 무엇을 정정할 것이 있는가?”고 떠들어대니 정재관은 분을 참지 못해 스티븐스를 가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8 3 23일 오전 9 10분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와 한국 통감부의 특별 밀명을 띠고 워싱턴DC로 이동하기 위해 오클랜드까지 가는 페리 부두에 도착했다. 그리고 20분쯤 군중 속에서 한 젊은 한인 남성 전명운이 그에게 튀어 나와 가슴에 품었던 총을 꺼내 격발했다. 두 번에 걸쳐 방아쇠를 당겼으나 두발 모두 불발되자 전명운은 곧 권총을 거꾸로 잡고 스티븐스를 가격했다.

 

전명운 의사

 

그 때 , , 하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스티븐스가 곧 달아나려 하자 이번에는 한국인 청년 장인환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첫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빗맞았고 나머지 두발의 총알은 스티븐스의 등과 허리에 명중했다. 놀라운 사실은 정명운, 장인환 두 의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로 놀랍게도 한 날 한 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장인환 의사

 

피격 당시 쓰러진 스티븐스와 전명운은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스티븐스는 이틀 뒤 복부탄환 제거 수술 도중 사망했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1908 327 3면에 '스티븐스 사망 일본 애도'라는 제목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42일 도쿄에서 한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토 백작이 토마스 오브라이언 일본주재 미국 대사와 장시간 대화 후 스티븐스의 죽음은 국가적 재앙이다. 충성스런 친구이자 일본과 미국의 공복인 그의 죽음을 양국 국민들이 애통해 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을 착취와 부패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위해 한국에 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제 앞잡이 스티븐스()와 당시 일제 앞잡이 처단 사건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

 

 

전명운 의사는?

 

전명운(1884-1947) 의사는 1903 1월 유학 길에 올라 중국 상해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였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장에서 일하다가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후에도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철도 공사장과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던 전명운 의사는 안창호 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각종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1908 3 23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공격했고 이때 장인환의 총격에 총상을 입고 장인환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을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에 따라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전명운 의사는 훗날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하고 1920년 결혼해 12녀를 두었다. 1929년에 부인을 여읜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자녀들을 양육하며 살다가 1947 1118일에 타계했다.

 

해방을 맞고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전명운 의사는 평생 일본 음식은 먹지 않았고 일본인을 증오하며 살았다. 한인사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삼일절이 되면 강연을 하기도 한 전 의사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의 캘버리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1994 4월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참고로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유학을 위해 1902 10월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1903년 한인 노동자 18명과 함께 설립한 단체였다. 초기에 친목단체로 시작하였으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들로 가난했지만 수입의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다.

 

 

장인환 의사는?

 

한편, 장인환(1876-1930) 의사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어렵게 자라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1905 28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역, 농장, 잡부 등의 일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알게 되어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대동보국회(19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을 펼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3 23일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해 처단한 후 선행은 “스티븐스는 일본의 보호정치를 도와주었다. 이런 매국노를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조국대한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뭐요? 수십만 명이 그의 계획 때문에 죽어갔소. 그러니 나는 내 조국을 위해 그를 쏜 것이요.”

나는 투옥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순국하고 싶소. 나는 조국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했고 법이 나를 어찌할지는 관심이 없소.”

 

의거 직후 장인환 선생은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 받았지만 변호인들이 애국행위로서의 장인환 의사의 거사를 무죄로 주장했다. 당시 한인 사회는 스티븐스 저격 사건을 전후로 힘을 모아 한인공동회를 개최하고, 장인환 선생의 공판 투쟁을 펼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장인환 선생은 25년 금고형을 선고 받았고 복역 10년 만인 19191월 가석방되었다.

 

11년의 복역을 마친 장인환 의사는 1927년에는 귀국해 고향에서 조만식 선생의 주례로 가정을 이루고 평북 선천에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일제의 학정 밑에서는 살 수 없다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93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 정부는 1975년 장인환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출소 후 뜻 깊은 만남을 가진 장인환 의사(오른쪽)와 전명운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