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7일

남로당 총책 김삼룡 검거

산풀내음 2017. 1. 26. 20:33

1950 3 27,

남로당 총책 김삼룡 검거

 

김삼룡(1910-1950)은 조선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 당한 해인 1910년 충북 충주군 엄정면이라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김삼룡 삶을 결정하는 세 차례 고비가 있었다. 보통학교 1학년 때 민족주의자 이재현 선생을 만나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과, 19살 나이로 보통학교를 마친 다음 서울로 올라가 고학생들 자활단체인 고학당 ‘칼토페’에 들어간 것과, 이재유를 만난 것이 그것이었다. 칼토페에 나가면서 공산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고, 독서회를 만들어 공산주의사상을 파고들어 가다가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게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 받는다.

 

 

1931년 여름, 채석장에 사역을 나갔던 김삼룡은 3 6개월짜리 징역을 살고 있던 ‘30년대 최고의 혁명가’로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였던 이재유와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일본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로 맹활약하다가 돌아온 이재유는 그에게 큰 감명과 함께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채석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 절친해져 석방되면 함께 운동하기로 의기투합한다.

 

먼저 출옥한 김삼룡은 고향 엄정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한편 농민들을 조직해 사회주의 학습을 시킨다. 두꺼운 입술과 주름진 얼굴이 소탈한 농부처럼 보이지만 대화 상대방을 한 번에 끌어들이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김삼룡은 민족해방운동의 무풍지대였던 충청도 내륙의 농촌마을을 서서히 항일 분위기로 바꿔 놓는다.

 

이재유가 출옥한 것은 이듬해 연말로, 김삼룡의 조직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간파한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충주 엄정으로 연락을 보내 김삼룡을 올라오게 한다. 두 사람은 협의 끝에 이재유는 경성에서, 김삼룡은 인천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한다. 조직형태로는 어느 한 지도자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하부조직은 물론 상부조직까지 모두 세 명 이상이 한 개 조가 되어 공동으로 결정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민주적인 방식인 트로이카를 택했다.

 

김삼룡은 1933년 하반기부터 인천부두에 하역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자 조직에 착수, 얼마 안가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나중에 일경이 재구성한 조직표에는 김삼룡이 이백만, 이석면과 함께 인천 적색노조 트로이카로 활동했으며 하부에는 박봉국, 한금동, 한봉열의 트로이카가 있다고 나온다. 다른 한편, 경성 지역에서는 이재유, 이현상, 이순금 등의 지도 아래 그 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6개 이상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연대 파업이 일어나 사회를 놀라게 한다.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가 이듬해까지 160여명을 검거하고 이를 통 털어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부른다. 1934 1, 김삼룡이 체포되고 박진홍과 이재유에 이어 이현상도 체포된다.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해 버렸으나 김삼룡과 이현상은 장기간 옥살이에 들어간다.

 

출옥 후 1939년 이관술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였고, 이후 갓 출옥한 이현상과 박진홍이 합류하고 박헌영을 지도자로 모신다.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대규모 조직으로, 이듬해 겨울부터 시작된 일제 검거로 구속된 인원만 1백 명에 이르렀다. 해방 전 공산주의자들 충결집체였던 경성콤그룹은 1940 12월 김삼룡이, 1941 1월 이관술이 체포되면서 무너지게 된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8·15해방 다음날인 8 16일 출감했다. 이후 박헌영과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모아 8 21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45 9 11일 재건준비위원회는 해체되고 박헌영을 총비서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장안파 조선공산당을 흡수·통일했는데, 김삼룡은 그곳에서 조직국 간부를 맡았다.

 

1946 9월 박헌영이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하였지만 이주하와 함께 월북을 거부하고 김삼룡은 ‘서울지도부’의 총책이 되었다. 결국 김삼룡은 1950 3 27일 체포되었다. 이 때 경찰은 김삼룡이 일곱 명이나 되는 첩을 두고 숨어 다녔다고 했으나 실제로 그가 잡힌 곳은 본처가 운영하던 반찬가게로, 여자 문제는 악의적인 비난이었을 가망이 높아 보인다.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어 남로당이 붕괴되었다고 전하는 <동아일보> 1950 4 1일 기사.

 

정태식, 이주하 등 오랜 동료들과 함께 한 마지막 재판에서 김삼룡은 검사의 논고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소. 나를 이 이상 더 욕보이지 말고 처형해 주시오.”라고 했다. 재판장은 앞서 이주하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삼룡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3개월 후, 북한 정권은 북한에 남아있던 조만식과 남한에 잡힌 김삼룡, 이주하를 바꾸자고 제안해 온다. 이승만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그리고 불과 사흘 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이승만이 강력한 경쟁자 조만식을 구명할 의사가 전혀 없던 것처럼, 애초에 북한 김일성도 자신의 경쟁자가 될 두 사람을 구명할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발발한 지 다시 사흘만인 1950 6 27, 헌병대 사령부에서 취조 받고 있던 두 사람은 국방장관의 명령에 따라 남산기슭 소나무 줄기에 쇠사슬로 묶인 채 총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