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7일

닛산, 르노의 계열사로 편입

산풀내음 2017. 1. 26. 20:49

1999 3 27,

닛산, 르노의 계열사로 편입

 

세계시장 점유율 6위 닛산자동차(일본 2) 9위 르노자동차(프랑스 1) 27일 자본제휴를 포함한 포괄적 제휴에 최종 합의, 세계 4위의자동차 연합을 구축하게 됐다. 하나와 닛산 사장과 루이 슈바이처 르노 회장은 이날 도쿄에서 서명식을 갖고르노가 닛산의 주식 36.8%를 매입, 1 대주주가 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르노가 총 6430억 엔을 출자, 경영난을 겪는 닛산을 계열 산하로 편입시키는 형태이나 양측은대등한 제휴임을 강조했다.

 

닛산은 1914년 첫걸음을 내디뎠다. 미국에서 자동차 기술을 공부한 엔지니어 하시모토 마스지로가 설립한 닷선자동차가 그 효시다. 하시모토는 창업 당시 자본금을 지원해준 세 사람(덴 켄지로, 아오야마 로쿠로, 타케우치 아케타로)의 성의 영문 첫 글자 D, A, T를 따서 DAT(닷도)자동차로 이름을 지었다, 1931년 이모노 이바타가 인수하면서 닷도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Datson에서 태양(Sun)을 사용한 닷선(Datsun)으로 회사 이름을 바꾼다. 당시 일본이 군국주의를 앞세워 재벌 키우기에 나서면서 닷선은 일본을 대표하는 자동차 업체로 쑥쑥 성장했다. 사세가 커지면서 1933년에는 도쿄 근처 요코하마에 본사를 짓고 이듬해 닛산자동차로 회사명을 바꿨다. 이어 1935, 일본의 첫 양산차로 기록된 ‘닷선15’를 출시한다. 토요타가 1937, 혼다가 1952년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한참 빠른 셈이다.

 

 

일본에서는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판매의 토요타, 기술의 닛산, 엔진의 혼다’라는 말이 유명했다. 그만큼 닛산은 신차를 만들 때 신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토요타는 어떤 경쟁업체가 신기술을 개발해도 6개월 만에 신차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 흡수 능력과 품질을 앞세운 생산성에서 우위를 보였다.

 

닛산과 토요타의 차이점은 ‘달리는 즐거움(Fun to Drive)’이다. 토요타가 검증된 기술을 사용해 고장 없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신차 개발에 주력했다면 닛산은 신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해 다이내믹한 주행성능으로 차별화했다. 독일에서 벤츠에 대항했던 BMW 라고 할까.


닛산은 1950년대에 본사를 한국의 명동에 비유되는 도쿄 긴자(銀座)로 옮기면서 도쿄의 대표적 기업이 됐다. 시골에서 출발한 토요타(나고야), 혼다(하마마츠)와 사풍도 사뭇 달랐다. 세련된 유명 대학 출신들이 유독 많았다.

 

1990년대 중반 토요타, 혼다, 닛산의 고위급 임원 가운데 도쿄대학 출신 비율을 보면 토요타는 10~20퍼센트, 혼다는 10퍼센트 미만인 데 비해 닛산은 무려 60퍼센트가 넘었다. 문제는 도쿄대 임원들의 파벌 싸움이었다. 연구개발, 생산은 도쿄대 공대가 잡았다. 재무, 영업, 마케팅은 도쿄대 법대 출신이 맡았다. 그러다 보니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생겼다. 1990년대에 닛산이 몰락한 중대한 이유다. 기술 분야 임원들은 “좋은 차를 만들어줬는데 판매, 마케팅이 실력이 없어 문제”라고 둘러댔다. 판매 분야 임원들은 “토요타에 비해 품질과 인테리어가 좋지 않아 판매가 떨어진다”면서 연구소와 생산에 핑계를 댔다.

 

더구나 도쿄대 선후배가 고위층에 대거 몰려 있다 보니 이른바 ‘봐주기’ 문화가 생겨났다. 통상 사장 승진이 안 된 부사장급은 계열사 사장으로 나가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선배가 맡은 계열사를 후배 사장이 건드릴 수 없게 되면서 계열사의 부실이나 품질 문제를 덮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계열사들이 닛산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이익을 내는 중병에 걸린 셈이다. 1998년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임원회의에서는 “소비자가 닛산의 신기술을 모르는 게 문제니 소비자를 교육해야 판매가 증가할 것”이라는 기가 찬 결론이 나올 정도였다. 닛산의 동맥경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에게 혼동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토요타는 신 모델이 나와도 실내에 편의장치를 조작하는 버튼의 위치가 일정한 반면 닛산은 들쑥날쑥했다. 닛산차를 타던 소비자들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개발비도 많이 들었다.


결국 닛산은 1999 6월 르노에 인수됐다. 그리고 카를로스 곤이 부임했다.

 

CEO 카를로스 곤

 

곤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능력 위주의 인사다. 또 닛산이 없으면 이익을 내지 못하는 계열사들을 정리해 몸통을 가볍게 했다. 외국인인 곤의 눈에 도쿄대 선후배들을 안배하는 인사는 있을 수 없었다. 닛산이 불과 2년 만에 흑자를 내면서 순식간에 부활한 가장 큰 비결은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있던 도쿄대 인맥을 치료한 것이었다.

 

닛산은 2000 6,000억 엔( 6 3,000억 원) 적자에서 2001년 단숨에 3,720억 엔( 3 9,000억 원) 흑자로 돌아섰다. 그리고 1 4,000억 엔에 달하던 악성 부채를 모두 변제했다. 닛산의 부활로 곤 회장은 단숨에 세계적인 경영자가 됐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부활은 닛산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도 나온다. 자동차의 기본인 기술개발과 생산관리에서 토요타와 맞먹던 닛산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