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31일

일본 적군파 소속 9명, 일본 여객기 하이재킹

산풀내음 2017. 1. 28. 01:14

1970 3 31,

일본 적군파 소속 9, 일본 여객기 하이재킹

 

고니시 등 일본의 극좌행동주의 조직 적군파(Japanese Red Army)의 조직원 9명은 1970 3 31일 범인 외에 승객 122명과 승무원 7명을 태우고 하네다공항을 이륙해 후쿠오카로 가던 요도호를 납치했다. 당시 일본항공(JL)은 보유기마다 애칭을 붙였었는데 납치된 요도()는 오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강 이름이다.

 


 

요도호 공중납치사건은 일본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가 일으킨 일본최초의 공중납치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적군파는 일본국내에서의 비합법투쟁을 위해 해외망명기지가 필요하다는국제근거지론에 따라 외국에 조직원들을 파견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때 마침 적군파 의장인 시오미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 때 「H·J」라고 적힌 메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 하이잭사건을 접해본 적이 없는 경찰공안관계자는「H·J」가 하이잭(Hijack)을 뜻한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군파는 이를 계기로 서둘러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드디어 1970 331일 도쿄 하네다를 이륙하여 이타즈케공항(현 후쿠오카공항)으로 향하던 일본항공 JL351(B727-89, 기체번호 JA8315)은 승객을 가장한 9명의 탈취범들에 의해 공중 납치당하게 된다. 탈취범들은 조종실을 점거하고 기장에게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도록 지시했다. 이시다기장은 항공기가 국내선이라 연료가 부족해서 재급유가 필요하다고 탈취범들을 설득, 오전 859분 목적지인 이타즈케공항에 착륙했다.

 

이곳에서 일본경찰은 탈취범들과 협상을 시도하지만 불발로 끝나고 결국 연료를 채운 대가로 부녀자와 환자 등 23명의 승객이 석방됐다. 오후 159분 요도호는 승객 99, 승무원 7명을 태우고 이타즈케공항을 이륙했지만 기장이 얻은 지도는 중학생용 지도책에서 복사를 뜬 것으로 항로를 알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기체는 동해상공으로 복상하다가 240, 진로를 서쪽으로 바꿨다. 드디어 요도호가 38도 선을 넘어서자 부조종사는 북한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지시된 주파수로 맞추고는 「여기는JAL 351편 응답하라」라고 몇 번이나 외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38도선을 넘기는 했지만 비행기는 아직도 한국 측 영공에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여기는 평양진입관제소 응답하라라는 무선연락이 오면서 주파수를 121.5MC에서 134.1MC로 바꾸도록 지시 받고, 이후 관제사의 유도에 따라 좌 선회하여 남하했다. 오후 316분 평양국제공항으로 여겨지는 장소에 착륙하게 되는데 사실은 평양이 아닌 김포공항이었다. 한국병사가 북한병사 차림을 하고, 여성병사가환영 평양도착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괴한 중 한 명이 노스웨스트 항공기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 한다.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탈취범들은 이곳이 평양이 아님을 금새 알아차린다.

 

그러나 기체는 활주로를 벗어나 있었고 엔진도 정지시킨 뒤라, 다시 시동을 걸려면 별도 보조동력장치(APU, Auxiliary Power Unit)가 필요했다. 일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식음료가 실리면서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북한 측으로부터 「인도주의에 따라 기체가 오면 승객, 승무원을 모두 송환하겠다」라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한국 측으로서는 1969 12 10일 대한항공 YS-11여객기 피납 사건(승객 47명 승무원 4명을 태운 채 원산으로 피랍해 자진월북이라고 주장하면서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을 억류)을 당한 터라 강경했지만, 일본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결국 북한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43, 인질범들은 일본 운수성 차관 야마무라(山寸新治郞)가 인질을 석방하면 대신 인질로 평양으로 동행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하고, 승무원 3인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 79시간 만에 야마무라 차관을 인질로 잡고 북한으로 떠났다. 오후 65분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북한영공으로 들어갔다. 날이 어두워서 육안으로 평양교외에 있는 작은 활주로를 찾아서 착륙했는데 그 때가 721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용으로 사용했던 미림비행장이었다. 북한 측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라 탈취범들은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들의 무기가 모두 장난감이나 모조품이었다고 한다. 승무원 3, 야마무라 그리고 인질범 들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틀 뒤 45일 아침 기장, 부조종사, 항공기관사, 야마무라 차관은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왔고 이 사건은 일단 수습됐다. 3 31일 사건발생에서 4 5일 오전 귀국하기까지 122시간이 걸렸다.

 

 

일본 정부는 이들 납치범들을 국제수배 했다. 납치범 9명 가운데 3명은 사망했고, 2명은 일본과 타이에서 각각 체포된 뒤 일본에서 이미 재판을 받았다. 2011년 현재 북한에는 4명이 생존해 있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과 결혼한 일본 여성 2명을 포함해 모두 6명의 송환을 북한에 요구해왔다.

 

 

北 망명한 日 요도호 납치범 "감옥 가더라도 고국 보내달라"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04/2014120400362.html


일본항공(JAL) 요도호를 공중 납치한 적군파 조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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