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일

포클랜드 전쟁 발발

산풀내음 2017. 1. 29. 21:15

19824 2,

포클랜드 전쟁 발발

 

1982 4 2일 이른 아침 아르헨티나 해병 25백명이 항공모함의 지원을 받으며 포클랜드 수도 포트스탠리를 침공했다. 포클랜드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84명 밖에 안 되는 영국군 수비대를 제압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침공 후 아르헨티나는 영국명 포클랜드 대신 아르헨티나명인 말비나스로 개칭하고 영국군을 모두 추방했다. 그리고 섬에 1 8천명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 대폭 증강하기 시작했다.

 

Lieutenant General Leopoldo Galtieri, leader of theArgentine Junta(L) and Admiral Jorge Anaya was the driving force in the Junta's decision to invade.(R)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면적과 비슷한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로부터 680Km, 영국으로부터는 무려 1 3Km나 떨어진 외진 곳으로 당시 인구는 1,800명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는 남극 대륙의 전진기지로, 주변에 상당한 양의 석유자원이 매장된 자원의 보고로 주목 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목축업에 종사하는 황량한 섬이었다. 이 섬에 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제국주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중엽, 남아메리카 전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스페인은 이미 포클랜드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영국인들을 추방하고 이곳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1808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정복돼 막강했던 힘을 잃자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을 선포했고, 1820년 이곳에 대한 소유권도 공식 선언한다. 1883,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대영제국이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이 섬에서 아르헨티나 수비대를 몰아내고 자국의 속령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르헨티나는 그 후 포클랜드 전쟁이 터질 때까지 150여 년 동안 포클랜드 제도의 반환을 영국에 줄기차게 요구하지만, 이빨도 먹혀 들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계속된 군부 통치가 이어진 아르헨티나의 정치, 경제 상황은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죠. 1981년 참모총장에서 대통령직에 오른 ‘갈티에리’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민심이반에 따른 반발을 외부로 표출하고자 포클랜드 침공이라는 초강수를 둔 게 된다.

 

아르헨티나 갈티에리 대통령은 섬에 살고 있는 18백 명의 주민과 60만 마리의 양을 위해 영국이 전쟁이라는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침공을 감행했으나 그것은 판단착오였다. 더구나 경제 위기와 군정 종식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분노에 봉착한 갈리에티는 돌파구를 이 전쟁에서 찾으려 했다.

 

영국의 여론은 ‘침략자에 대해 응징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침공 3일째 되는 4 5일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43척의 기동함대가 편성되어 포클랜드로 항진한다.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 이끄는 영국 정부는 미국과 UN을 통한 협상을 추진하는 한편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무력사용을 준비했던 것이다.

 


 

포클랜드 탈환 작전에 동원된 영국군 병력은 모두 9천 여 명으로, 본토로부터 가까워 군수지원이 유리한데다 병력 수에서도 우위에 있는 아르헨티나 군에 비해 열세인 듯 보였지만 전문 직업군으로 이루어진 영국군은 전투원 개개인의 기량이나 지휘관의 능력 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 영국군은 본토를 출발한 뒤 상륙작전이 개시될 때까지 46일 동안 해상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통해 전투에 대비했다.

 

본격적인 지상전을 앞두고 포클랜드 제도 인근 해상은 첨단 병기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영국군은 멀리 떨어진 기지에서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장거리 폭격기를 동원하고, 항공모함에서는 수직이착륙 전투기 ‘해리어’를 출격시켜 섬에 주둔한 아르헨티나군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기동함대에 대한 공습을 시도하니 양국의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된다. 5 3일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제네럴 벨그라노’가 영국 잠수함 ‘콩커러’의 어뢰에 의해 격침되는가 하면, 이튿날에는 영국 구축함 ‘쉐필드’가 아르헨티나 전투기가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에 의해 격침되는 일이 발생 한다.

 

아르헨티나 순양함 General Belgrano()는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HMS Conqueror의 공격을 받고 격침 당한다.

영국 구축함 HMS Sheffield함은 아르펜티나의 공군의 엑소세 미사일에 격침 당한다.

 

5 21일 새벽 4, 함포사격과 함께 영국군이 상륙을 개시했다. 5 27일까지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50마일의 험준한 산길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요 전투는 5 28일 ‘다윈’과 ‘구스그린’ 지역에서 벌어진다. 강한 돌풍과 짙은 구름으로 함포 및 항공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기관총 진지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대장이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다가 전사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아르헨티나군을 물리친다.

 


 

6 12일 야간부터는 포트 스탠리 코앞까지 진출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결사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영국군 앞에 아르헨티나 군인들 사이에 심리적 동요가 일어나고 한 순간에 방어진지는 무너져 내린다. 소총을 버리고 도망하는 아르헨티나군은 이미 군대가 아니라 무질서한 군중에 불과했습니다. 영국군은 패주하는 아르헨티나군을 포위망에 가두고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통해 압박을 가해 6 14, 아르헨티나군의 완전항복을 받아 낸다. 아르헨티나의 기습침공으로부터 74일만의 일이었다. 작은 섬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쌍방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영국군은 전사 256, 부상 2,600, 아르헨티나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670, 부상 994, 포로 10,951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