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산풀내음 2017. 2. 18. 08:12

19704 8,

와우아파트 붕괴

 

6.25전쟁 이후, 1953 7월 27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그때까지 철저히 제한되었던 한강 도강이 자유롭게 되자 많은 전재민(戰災民)이 일시에 들어온 데 이어,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60년대에 걸쳐 서울의 인구수가 격증한 데 따라 무허가 불량건물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무허가 건물의 정리를 지시한다.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현옥 시장은 각 구청에 지시하여 무허가 건물 전수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13 6,650동이 집계되었다. 김현옥 시장은 4 6,650동을 이른바 양성화라는 이름으로 현지 개량하고, 나머지 9만 동을 시민아파트를 건립하여 아파트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경기도 광주군(현재의 경기도 성남시)내에 대단지를 조성하여 이주, 정착시킨다는 방침을 세운다. 1968 12월 3,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이 발표되고, 1969 1년 동안 32개 지구에 406 1 5,840가구 분의 아파트를 건립한다.

 

와우아파트 건립 전 판자촌


 

와우아파트는 서울특별시와우산 일대에 건설한 시민아파트였다. 무면허 건설업자는 가파른 중턱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이유는 김현옥 시장이 자신의 업적이 대통령에게 일부러 잘 보이도록 산 중턱에 지었다. 건설 허가를 따내기 위해 쓴 뇌물로 인해 공사자재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철근 70개를 넣어야 튼튼하게 유지될 기둥에 고작 5개의 철근을 넣을 정도로 부실공사를 행했다. 그 결과 준공 4개월 만인 19704월 8 오전 6 40분경 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 사망 33, 부상 38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또한 무너진 아파트 잔해가 아파트 아래에 있던 판잣집을 덮쳐 판잣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1명이 사망했고,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총 사망자 34, 부상자 40)

 


 

4개월 전 준공된 5층짜리 와우아파트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이 야심 차게 추진한 달동네 재개발사업의 효시였지만 이 사고로 부실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건물을 60도나 경사진 와우산 중턱에 세운데다 기둥에 쓰인 철근도 규격보다 적고 시멘트 배합량도 기준에 미달하는 날림공사가 원인이었다. 준공된 지 4개월 밖에 안된 와우아파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취약한 지반을 만천하에 까발린 계기가 됐고 무리한 고속개발에 대한 첫 대규모 경고음이었다. 결국 서울시의 무사안일과 눈앞의 이익에 만 급급한 건설업자의 과욕, 여기에 사회전반에 만연된 고속성장에 대한 조급증과 안전불감증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인재(人災)였다.

 

이 사고로 인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이 일주일 뒤인 4월 16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까지 지어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총 대상 405동 중 349동이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한편 사고가 발생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와우아파트 다동 뒤의 높이 3m 축대가 다시 무너지는 사고가 났으며, 1984년에는 2동 뒤편 와우산 일부가 폭우로 무너져 내리면서 204호와 205호를 덮쳐 다시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 현재 와우아파트는 철거되었고, 철거 부지는 녹지 공간 와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

 

그 즈음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 조영남은 '신고산타령'의 가사를 '신고산이 우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로 바꿔 불렀다가 기관원에 끌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시인 김정환은 시 '와우아파트'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 희망이 산산박살난 듯 / 와우아파트는 무너져내린 다음에도 / 와르르 소리를 여전히 외치고 / 와르르 소리는 그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 판잣집들을 아직도 덮치고 있었다 / 거대한 것이 약한 것을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