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2일

서울대 김상진 할복자살

산풀내음 2017. 2. 24. 22:03

19754 12,

서울대 김상진 할복자살

 

1975 4 11일 서울대 농대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이 수원 농대 캠퍼스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며 할복, 4 12일 운명했다. 구속학생 석방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 였다. 김상진은 3번째 연사로 양심선언문을 읽고 난 후 준비해 간 과도로 하복부를 깊게 찔러 위로 그어 올렸다. 수원도립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이튿날 오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오전 8 55분에 앰뷸런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김상진은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최초의 인물이다.

 


 

1975년 봄은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수백명의 언론인이 ‘언론자유’를 외치다 거리로 쫓겨났고, 1975년 봄 대학가 역시 유신반대 투쟁 열기로 뜨거웠다. 첫 시위는 고려대생들이 시작했다. 권순성, 박구진, 설훈, 김관회, 문학진, 최규엽, 신태식, 신계륜 등이 모의를 했고, 331 1500명이 대강당에 모여 비상학생총회(회장 도천수)를 구성해 반독재구국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46~7일에는 2000명이 야간까지 시위를 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만을 대상으로 하는 희한한 ‘긴급조치’를 발동했고, 안암동 교정에 진입한 계엄군은 고대생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폭력을 가했다.

 

서울대생들 역시 시위에 나섰다. 그해 3월부터 옮겨간 관악캠퍼스에서 원혜영·박우섭·박인배 등이 “첫번째 시위 테이프를 끊자”는 결의를 실행한 것이다. 6일에는 수원의 농대, 7일에는 다시 관악, 8일에는 동숭동에 남은 치대와 약대에서 잇따라 시위를 벌여 53명이 제적되고 16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48일 ‘인혁당’ 관련 7명과 ‘민청학련’ 관련 여정남이 선고 직후 전격 처형당하는 ‘초유의 사법살인 사태’가 벌어지자 대학가는 뜨거워졌다. 이화여대 4000명의 농성을 시작으로 410일 중앙대, 건국대, 경희대, 경북대, 경기대, 인하대 등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411일 서울대 농대 집회에서는 김상진(축산과 4)이 ‘양심선언’을 낭독하고 할복해 파문을 더했다. 김상진의 선언은 비장했다.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우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세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 …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의 죽음이 반유신의 상징으로 남지 않도록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숨을 거둔 지 15시간 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게 했으며, 서울대 농대를 사실상 폐쇄했다. 각 대학에도 휴교·휴강 조치를 내려 4월 중순까지 25개 대학이 전면 휴강에 들어갔으며, 시위 주동자의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4월 22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고, 예정대로 열렸다. 4월 22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5 13일 체제에 관한 어떤 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5 22일 오후 1시 관악 캠퍼스에서 기어이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긴급조치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여 56명이 구속됐다. 이 사건은 세칭 `오둘둘(5.22)사건`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