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2일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 암살배후 폭로

산풀내음 2017. 2. 25. 06:49

19924 12,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 암살배후 폭로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76)가 범행 43년 만에 김구 선생의 암살배후에는 당시 특무대장이었던 김창룡이 관련돼 있다고 1992 4 12일 폭로했다. 안씨는 또 범행에 앞서 김씨 외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당시 미CIA 한국 담당자였던 미군 중령과 수 차례 만나 김구 선생은 없어져야 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구 암살범 이승만과 안두희

 

이 같은 사실은 권중희씨 등 3명이 4 12일 오전 11시쯤 인천시 신흥동 안씨의 집을 방문, 8시간 동안 면담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안씨는 "입당 이후 서너 차례 경교장에 드나들며 백범 암살기회를 노리던 중 1949 6 26일 우연히 경교장에 들렀을 때 김구 선생이 독서를 하고 있어 범행 적기라고 생각해 암살을 결행했으며 당시 자신은 포병장교로서 일선 중대장으로 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권총과 실탄은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또 안씨는 범행직후 헌병대로 연행됐으나 그날 밤 곧바로 특무대로 이송되어 김창룡으로부터 "안의사 수고했소" "불편한 것 있으시면 말하시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政敵 김구 선생을 언제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는 이승만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 경교장 앞뜰에 몰려와 애도하는 시민들. 암살범의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나간 흔적이 선명하다.

김구 선생님 장례 행렬

 

안씨는 이 때문에 특무대에서의 생활은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술, 불고기, 냉면, 담배 등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안씨는 지금까지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김대장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와 언론에 공개될 경우 나에게 쏟아질 보복 때문에 미뤄왔다고 밝혔다.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 초기에 토지측량기사로 큰돈을 번 졸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안두희 집안은 모든 재산을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안두희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그들 가족은 신의주바닥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청천강 강마을로 피신했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다시 의주로 갔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안두희는 공산당에게 세 번이나 쫓겨난 뒤 월남했다.

 

김구 선생 암살 후 안두희()와 권중희씨의 응징을 받은 후의 안두희()

 

1947년 안두희 가족은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온 뒤 한동안 처제네 집에서 묵었다. 안두희는 곧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이 무렵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48 11, 안두희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3개월 후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949 4, 안두희는 동향 홍종만의 주선으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추천을 받아 당원이 되었다. 이는 김구 살해사건의 원인을 한독당 당내 내분으로 조작하려는 치밀한 음모였다. 마침내 안두희는 1949 6 26일 한낮 경교장에서 그가 소지한 미제45구경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네 번 당겼다.

 

안두희는 1949 8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43(정치관여)와 제48(살인)를 적용하여 총살형을 구형 받았다. 곧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종신형을 판결 받고 수감되었다. 그런데 안두희는 복역 3개월만인 1949 11,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종신형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50 6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틀 뒤인 6 27일 대전 육군형무소에 육군정보국 김창룡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육군형무소장에게 국방부장관의 안두희 잔형집행정지처분 명령서를 전하자 즉시 안두희는 석방되었다.

 

1950 7 10일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방부 특명 제4호에 의거하여 안두희를 육군 소위로 복직시켰다. 1952 12 25,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새로 이기붕이 발탁되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두희를 그대로 두면 민심이 더욱 흉흉하다고 건의하여 안두희를 국방부 특명 제229호로 예편과 동시에 1계급 특진시켜 육군 소령으로 군복을 벗겼다.

 

이후 안두희는 김창룡, 그의 사후에는 이재학, 김진만, 이상철 등 자유당 권력 실세들의 비호로 강원도 양구에다 군납공장을 차려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우리 사회 주류로 살았다.


하지만 이땅에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키고자 한 권중희 등 여러 의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1996 10 23일 오전 1130분쯤 인천 자신의 집에서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는 박기서씨에 의해 피살됐다.

 

안두희 처단에 앞장 선 의인 권중희()씨와 정의봉으로 처단한 박기서씨()

 

김창룡(1920 7월 18 ~ 1956 1월 30)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부사관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여순 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다. 6·25전쟁 중 서울수복 직후에도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잔류 시민들의 부역자 여부를 색출, 탐문,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을 엄히 다루어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있으면서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정치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파를 축출하였다.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朴正熙, 후에 5~9대 대통령을 역임)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혁혁한 전공과 실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 가운데, 자신보다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무시하면서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된다.

 

김구 선생 살해범 이승만과 김창룡, 이승만이 김창룡에게 , 내 말 알지?라고 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1956 1월 30 오전 7 30분 서울 원효로 1가 출근길에 당시 육군 제2군사령관 강문봉(姜文奉, 1923 10월 26 ~ 1988 2월 26) 중장이 배후를 조종하고 당시 육군본부 정병감 이진용(李珍鎔) 대령이 배후 교사 및 방조로써 보낸 육군 서울병사구사령부 참모장 허태영 대령과 그의 운전수 이유회 육군 중사, 그리고 육군 소령으로 위장한 송용고와 육군 중위로 위장한 신초식 4명의 용의자들에 의해 피격, 현장을 탈출하려 하였으나 추가로 쏜 권총 다섯 발을 맞고 사망했다.

 

김창룡을 사살한 의인들, 이유회(왼쪽)과 허태영(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