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5일

타이타닉호 첫 출항서 침몰

산풀내음 2017. 2. 28. 21:36

19124 15,

타이타닉호 첫 출항서 침몰

 

20세기 초 조선업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하란드 월프 사의 회장인 피리 경이, 런던메이 페어의 저녁 식사 모임에서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이즈메이 사장에게 3척의 대형 여객선의 건조 계획을 말한 것이 타이타닉 호 건조의 발단이었다. 설계는 토머스 앤드루스가 맡았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블루리본으로 불렸던 북대서양 여객선들의 속도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쾌적한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고 있었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 설계에 방수구획을 도입하였다. 이런 규모와 시설로 별명이 불침선(The Unsinkable)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이 배는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을 것이다" 라고들 회자되었다.

 

건조중인 RMS 타이타닉 (1909 ~ 1911)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RMS 올림픽을 시작으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을 운용하였으며, RMS 타이타닉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RMS 타이타닉은 벨파스트에 있는 해럴드 울프 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하여 1911 5 31일 진수하였다. 타이타닉 호는 올림픽 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가 개시되어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 등 외관에서나 내장 면에서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타이타닉호는 총11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내에 체육관과 수영장, 그외 호화로운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느슨한 규제때문에 구명정은 20척 밖에 없었다. 구명정의 정원은 1,178명이었다.

 





실내 운동시설까지 완벽하게 ..

 

1912 4월 10,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 ·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되는 사람을 태우고 항해를 시작했다 (정원 초과도 사고를 키우는 원이이 되었다). 이 배는 프랑스셰르부르(Cherbourg)아일랜드의 퀸즈 타운에 기항한 다음, 미국뉴욕으로 향했다.

 

타이타닉 이동 경로 및 침몰 지역

 

타이타닉호는 봄에는 빙산과 충돌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타이타닉호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코스를 고집한 것은 함께 대서양을 운행하는 경쟁사 큐나드 라인사()가 세계 최고속 신형 여객선 루지타니아호를 건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단시간으로 대서양을 횡단한 배에 주어지는블루 리본상도 선주와 선장을 자극했다.

 

출항 당시 승무원들에게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 망지기들이 눈으로만 위험 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는 후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된다.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는데, 특히 4월 14에는 빙산 경고를 6통이나 받게 된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또 빙산 경고를 선장에게 보냈지만 선장이 없어 항로를 변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가 마지막 빙산 경고를 보냈다. 타이타닉의 통신사 잭 필립스는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지만 늦은 시간이었기에 통신사 에반스는 이미 잠이 든 뒤였다. (이는 1,500여명의 사람을 죽게 하는 또 한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1912 4 14일 밤 11 40, 레지널드 리와 함께 견시를 보던 갑판 선원 프레더릭 플리트가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출항할 때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빙산의 10분의 9 숨어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결국 빙산은 우현에 충돌하였고 충돌 후 방수격벽 폐쇄 스위치를 작동시켰지만 이 모든 노력이 침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충돌 당시의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배는 오른쪽 앞부분 흘수선 아래로부터 찢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90m 크기의 구멍이 뚫려 3시간 만에 3,950m의 해저 속으로 가라앉았다. 구명보트도 승객수의 절반 밖에 없었다.

 

 

4 14 0 15분에 조난 신호를 발신, 인근 선박에 구조 요청하였다. 불과 20Km 전방에 정박중인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취침 중이어서 조난 신호를 받지 못했고, 대신 약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호가 SOS를 수신하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 부랴부랴 771명을 구조했지만 1,513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5명은 구명보트에서 사망했다). 배는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다. 8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으나 시신들은 파도에 쓸려가서 거의 보이질 않았고 흩어진 잔해들과 시신 1구밖에 보이질 않았으며 이때까지 물 속에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수색은 포기하고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 호에게 생존자를 더 찾아달라고 한 뒤에 3일 후 뉴욕에 도착했다.

 

Titanic survivors on board the RMS Carpathia.

1912 4 18일 타이타닉 생존자 귀환을 기다리는 군중


수심 3900m 에 잠긴 타이타닉호는 현대과학으로는 인양이 불가하다고 한다.

 

 

 

Titanic의 영웅 들

 

1)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Captain Edward John Smith, 1850-1912)은 구명보트에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지도하다가 끝까지 배에 남아 죽었다. 스미스 선장은 낮은 계층 출신이었으나 그 기품과 카리스마 덕분에 화이트 스타 라인의 고객 중에도 오로지 스미스 선장의 배만을 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원래 1911년에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회사측의 설득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출항하기로 한 것이 바로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였다. 절반 가량의 항해사 또한 순직했다.

 

 

2)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스는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선과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흡연실에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류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1등실) 승객들도 있었다. 어떤 승객들은 카드 게임을 계속했으며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T. 스티드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들 또한 모두 배와 함께 죽었다.

 

3) 기관장인 조셉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들과 화부, 전기 수리노동자 등 기관부 선원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화부장을 포함한 화부 일부가 탈출하기도 했으나, 기관장을 포함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다.

 

 

4) 두명의 전파사들도 선장이 이만 물러나가도 좋다고 한 후에도 끝까지 남아 전파를 보냈다. 이 중 해롤드 브리드는 살아남았지만 잭 필립스는 죽었다.

 

5) 월리스 하틀리(1878-1912)바이올 연주와 지휘를 맡은 8명의 연주대는 혼란에 빠진 승객들을 위로하기 위해 선박이 침몰하기 고작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졌으나 비극적이게도 그들 모두는 죽었다.

 

왼쪽에서 4번째 바이올린을 든 사람이 윌리스 하틀리. 하틀러의 바이올린이 든 가방은 발견된 그의 시신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6) 토마스 바일스 신부는 기독교 성직자의 양심으로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도왔다.

 

7)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스트라우스 내외는 금슬 좋은 노부부였는데 남편인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다른 사람들이 구조되기 전까지는 타지 않겠다며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배에 남아 남편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8)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은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운 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했다. 턱시도로 갈아입은 그는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 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9) 타이타닉호의 5등 항해사인 해럴드 로우는 구조자들을 인솔하기 위해 보트에 탑승했다. 하지만 보트가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곳으로부터 벗어나자 구조자들이 탑승한 보트를 전부 한곳에 모아놓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해럴드 로우는 자신이 탑승한 14번 배에서 여자, 어린이, 노약자들을 다른 배에 옮겨 태운 뒤 지원자들을 자신의 배에 모아서 타이타닉이 침몰된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 곳에서 해럴드 로우는 필사적으로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겨우 10명을 구조하는 데에 그쳤다. 이후 해럴드 로우는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도 해군 예비역으로 참전, 중령 계급에 이르렀다.

 

 

 

불길한 징조 들운명인가??

 

1) 우연인지 운명인지 많은 사람들이 출항하기 전 불길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선원은 자기 아내가 화이트라인사 로고가 새겨진 뜨개질을 하다가 엉켜버렸는데 이에 아내가 불행한 징조라면서 말려 가지 않았다고 한다. 수석 항해사 헨리 와일드는 출항 전 가족에게 뭔가 불길하다는 편지를 남겼는데 이게 그의 생애 마지막 출항이 되었다.

 

2) 침몰 전 배와 한참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제시라는 여자아이가 꿈에서 큰 배가 침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월리라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소녀가 꿈에서 보았던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월리 하틀리가 이끄는 악단은 가라앉는 배에서 생애 마지막 연주를 했다.

 

3) 특기할 만한 것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1912)가 일어나기 14년 전인 1898년 모건 로버트슨(Morgan Robertson, 1861-1915)이란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무용지물(Futility)>이 이 배의 침몰을 예언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슨의 그 소설 내용이 "'타이탄' 이란 초호화 여객선이 대서양으로 처녀항해에 나섰다가 빙하와 충돌하여 대형 인명사고를 낸다" 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탑승객 숫자와 구명 보트 수, 출발 항구, 사고 원인과 사고 지점, 배의 규모와 사고 시기가 14년 뒤에 실제로 일어난 타이타닉호 사건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다만 일부 내용이 소설 출간 이후 개정되기는 했다.) 그런데 작가인 로버트슨은 자신이 예측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저 선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을 꼼꼼하게 썼을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4) 이 배의 소유자인 제이 피 모건(John Piepont “J. P.” Morgan, 1837-1913)은 처녀 항해에 승선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날에 돌연 취소하였다. 어떤 계시를 받은 것인가?

 

J. P. Morgan, Americanv financier and banker who dominated corporate finance and industrial consolidation.

 

5) 유명한 허쉬 초콜릿의 창업자, 밀튼 허쉬(Milton Snavely Hershey, 1857-1945)도 승성할 계획이었지만 당일 취소하였다.

 

 

4) ‘The Titanic Disaster’의 철자를 재조합하면 ‘Death, it starts in ice’라는 문장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고 한다

 

1) 마사부미 호소노(Masabumi Hosono, 1870-1937)는 유일한 일본인 생존자 였다. 그는 일본에서 다른 승객처럼 죽지 않아 겁쟁이로 알려졌고 직장을 잃었다. 타이타닉 이전에는 평판이 좋았는데 이후 그와 그의 가족은 수십년 동안 수치심에 시달려야했다. 근래에 들어 생존자들이 '그가 최선을 다한 후 탈출하였다'는 증언으로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배와 함께 죽는 것이 옳다고 믿는 일본인이 많다. 일본 특유의 죽음을 미화하는 사무라이 문화 때문이다.

 

 

2) 바이올렛 요솝(Violet Jessop, 1887-1971)이라는 여승무원인 이 여성은 하이트 스타 라인 사가 건조한 재앙의 타이타닉 3총사에서 모두 구출 살아 남았다. 처음엔 1911년 올림픽호, 1912년 타이타닉호 마지막으로 간호사로 1차세계대전 중 병원선으로 개조한 수뢰로 침몰한 브리타닉호에서 살아 남았다. 그녀을 죽인 것은 1971년 심장마비였다.

 

 

3) 게이스럽게 생긴 이 작자는 여장하고 구명 보트에 올라타 살아 남은 바퀴벌레 같은 몇 남자 중 하나다. 이름은 다니엘 버틀러

 

 

4) 타이타닉호를 침몰케 한 빙산은 같은 장소에서 1000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