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

산풀내음 2017. 3. 1. 02:18

19194 15,

제암리 학살사건

 

1919 3 31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계획하였고, 3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다가오자 일본 헌병들이 출동해 경고 사격 후 칼을 마구 휘둘러 유학자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석방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흥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 주택,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

 

이에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4 2일 발안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검거하기 위해 헌병과 순사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해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4월 3 수촌리 구장 백낙렬(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교회 전도사 김교철,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4월 5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이에 4 5일 발안 장날이 되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군은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4월 13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주로 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 교회에서는 문맹퇴치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동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저변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이다.

 

4월 15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아리타는 15세 이상의 제암리 주민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 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아리타가 교회당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거세 교회당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당 위쪽으로는 일본군들이 불을 질렀다. 22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남편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부녀자 2명도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그리고 일부 군인들은 고수리로 가서 이미 파악한 고수리의 천도교인 6명도 살해했다.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제암리 학살의 증거들을 사진으로 찍고 "끌 수 없는 불꽃" 이라는 책을 저술해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 만행으로 사람, 가축, 곡식 등이 타는 냄새가 사방 10km까지 펴져나갔다고 한다. 당시의 한 선교사 일기에는 제암리 학살 이외에도 화성군 일대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고, 5개 교회에서 비슷한 만행이 자행돼 326채의 집이 불타고 1,6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39명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제암리 교회는 불타올랐고, 피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자 교회 아래쪽 집으로 불이 옮겨 붙었다. 불이 옮겨 붙지 않은 위쪽 집은 일본군이 직접 ...

제암리 학살로 남편을 잃은 여인 …

 

 

제암리 학살 은폐日 사령관 일기 발견 (동아일보 2007. 2. 28.)

 

1919 3·1독립운동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제암리 집단 학살사건을 조선군사령부(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부를 뜻함)가 철저히 은폐했음을 보여주는 사령관의 일기가 발견됐다.

 

아사히신문은 3·1운동 당시 조선군사령관이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대장이 남긴 15년분의 일기가 발견됐다고 28일 보도했다. 작성자 사후 80여년 만에 봉인이 풀린 일기에는 제암리 사건의 은폐 전말과 독립운동 진압 실태, 일본의 민족운동가 회유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주목된다.

 

1919 415 '제암리사건'이 일어나자 우쓰노미야는 '서울 남방에서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 방화'했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군은 사건을 발표하면서 학살 방화 사실을 부인했다. 그 이유는 418일자 일기에 나온다. "(사실대로 처리하면) 제국의 입장에 심히 불이익이 되므로" 간부회의에서 "저항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산회했다"는 것.

이튿날 일기에는 "사건에 관여한 중위를 진압 방법과 수단이 적정치 않았다는 점에서 30일간 중() 근신에 처하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 신문은 실제로 해당 중위에 30일간의 근신처분이 내려진 사실이 있다고 확인했다.

 

일기에 따르면 우쓰노미야는 당초 조선 민중의 저항에 나름대로는 이해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이 시작되자 우쓰노미야는 일본이 펼쳐온 '무단 통치' 방식을 비판하며 "조선인의 원망과 한탄 동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는 독립운동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학생 등이 주도해 외국인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봉기한 것으로 뿌리가 깊다고 분석하며 '무단 통치' "내켜하지 않는 처녀를 무리하게 결혼시킨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요가 갈수록 확산되자 그는 "지금까지의 진압수단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 11일 조선총독으로부터 군 동원을 허가받아 진압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일기에는 우쓰노미야가 훗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시대에 진행된 '문화정치' 시책을 한발 앞서 시작한 사실도 나타난다. 그는 3·1운동 와중에 천도교에 대한 회유를 제안하고(1919 3 20), 장차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 '자치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국에 진언하기도 했다(5 1일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 田中義一에게 보낸 서한). '배일파'(排日派)로 알려진 조선인과의 접촉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1920 220, 49).

 

일기에는 3.1독립선언에 서명한 한 종교지도자가 2 27일 그를 찾아와 "이번 고종의 국장 때 뭔가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우쓰노미야가 남긴 사료는 일기 15권외에도 서한 약 5000통과 서류 약 2000, 사진 약 200점 등 7200여점에 이른다. 이 사료는 도쿠마 참의원을 거쳐 손자 교조(恭三) 씨가 보관해오다 5년 전 기라 요시에 교수 연구진에 위탁됐으며 '우쓰노미야 다로 관계자료연구회'의 이름으로 문부과학성 보조금을 받아 18명의 연구위원이 자료 정리 작업을 해왔다.

자료 중에서 일기는 4월 이후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3권으로 정리돼 발간될 예정이다. 조선독립운동 관련기록이 몰려있는 1919년 전후는 뒷부분에 해당해 11월 이후에야 나올 전망이다.

 

우쓰노미야 대장은 일본의 군축을 주장하고 대 아시아 외교에 적극적이었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得馬, 1906~2000)전 일본 참의원의 부친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조선군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