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4일

서민호 의원, 말다툼 하다 서창선 대위 사살

산풀내음 2017. 3. 6. 20:18

19524 24,

서민호 의원, 말다툼 하다 서창선 대위 사살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안했으나 국회가 이를 부결하고 오히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해 이 대통령과 국회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던 때였다.

1952 424, 서민호(徐珉濠) 민의원이 이튿날 치러질 제1회 지방의회의원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을 찾았다. 오후 840분쯤, 서 의원 일행이 한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중 광주에서 출장온 서창선 대위와 사소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격해지자 서 의원은 권총을 발사했고 서 대위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국회가 정당방위를 내세워 살인혐의로 구속된 서 의원을 석방시키긴 했지만 이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던 국회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서 의원이 평소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 이 대통령이 기피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선거도 여당인 자유당이 압승을 거둔 터였다.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정체 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 듯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야당 의원들에게 공공연히 테러를 가했다. 곧 닥쳐올부산정치파동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5 25 0시를 기해 선포된 계엄령으로 다시 수감된 서 의원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계엄령 해제 후 8년 형이 확정돼 1960 4·19 때까지 7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서민호(1903. 4. 28. – 1974. 1. 24.) 1921년 보성고등보통하교를 졸업하고, 1923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전문부에 해당)를 졸업하였다.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을 거쳐,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재임 중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을 복역하였다. 광복 후 관계에 진출하여 1946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가 되었다. 1948년 조선전업사장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2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국회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 4월 자신을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徐昌善) 살해사건으로 복역, 8년째 되던 해 419혁명으로 출옥하였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 제15 UN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 5월 남북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검찰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63년 자민당 최고위원을 거쳐 민중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그 해 제6대 민의원의원에도 당선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정치투쟁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6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67년 민주사회당을 대중당으로 개칭, 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야당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과 공당으로서의 합당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 입당하였으며, 그 해 개인적으로 통일문제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