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4일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막, 남북단일팀 출전

산풀내음 2017. 3. 6. 20:22

19914 24,

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막, 남북단일팀 출전

 

1990 9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체육 교류를 통해 정치적 긴장을 해소하고자 했던 남북은 당시 한창 붐이 일었던 탁구와 축구의 단일팀 구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1991 2월 판문점 4차 남북 체육 회담에서 사상 최초로 남북 탁구 단일팀이 결성되었다. 남북한 단일 탁구팀은 '코리아'란 이름으로 출전하였다. 이 코리아 탁구팀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결성된 단일팀이었다. 남북 각각 31(임원 22, 선수 9)씩 총 62명으로 구성되었다. 하늘색 ‘한반도기’가 남북한의 국기를 대신해 사용되었고, 남북한 국가 대신 ‘아리랑’을 불렀다.

 

1991 3 25일 오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할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한 달간의 합동전지훈련을 위해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분단 46년 만의 첫 만남. 한반도를 그린 파란 단기아래에서 젊은이들은 전지훈련 도중 금방 작은 통일을 이뤘다. 남은 북을, 북은 남을 모방하였다. 북한 리분희는 저도 모르게 앗싸대신 파이팅을 외쳤고 현정화는 기랬지, 이 동무들하면서 북측 말을 흉내 냈다.

 

1991 4 24일 일본 지바에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개막됐다. 남측의 현정화와 홍차옥, 북측의 리분희와 유순복으로 구성된 여자팀은 10전승으로 결성에 올랐다. 결승 진출까지는 현정화가 팀을 이끌었다. 특히 난적 헝가리와의 준결전에서 리분희와 유순복의 부진 속에서 현정화는 2단식과 1복식을 따냈다.

 

1991 4 29일 일본 지바현(千葉縣) 닛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결승전. 최초의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 7000만 동포의 관심 속에 녹색테이블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대회 9연패를 노리는 중국이었다. `마녀` 덩야핑이 버티는 `철옹성`이었지만 출발은 상큼했다.

 

1, 2단식에 나선 유순복과 현정화가 덩야핑과 가오준을 각각 꺾어 2-0으로 앞서 나갔다. 다음은 환상의 복식조 이분희-현정화. 남북 단일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현-이 조는 덩야핑-가오준 조에 2-1로 역전패했다. 이어 현정화도 제4단식에서 패해 2-2로 승부는 원점. 마지막 단식에 나선 유순복의 어깨에 `코리아`의 우승여부가 걸렸다. 유순복은 변칙공격의 명수 가오준과의 첫 세트를 과감한 백드라이브로 21-19로 이겼다. 유순복은 2세트도 13-17로 끌려가던 경기를 21-19로 뒤집으며 승리, 코리아팀에 감격적인 우승을 안겼다.

 

드디어 남북이 하나 되어 세계를 제패했다.

 

 

단체전 우승은 1973년 사라예보 승전보 이후 18년 만이었다. 우승의 주역인 홍차옥, 유순복, 현정화, 이분희를 비롯해 우리 동포들은 경기장에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단일기가 오르고 단일팀가인 아리랑이 울려퍼지는 순간 남북의 7천만 동포는 그야말로 하나라는 것을 실감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 남북의 선수들은내몸 하나보다 코리아팀이 더 중요하다!” 는 각오하에 코리아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연습과 경기에 임했고, 그 결과로 단체전 우승을 일구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코리아팀 우승은 남북이 하나되어 이룩한 쾌거였고, 1991 5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FIFA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남북청소년축구 단일팀 출전으로 이어져 한반도 화해무드 조성에 큰 몫을 했다.

 

남북단일팀은 민감한 사안이었다. 자연히 남북이 모두 정보요원을 파견했다. 탁구를 통해 남북교류를 꾀하지만 돌발 사태는 막겠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탁구 외에 사적인 만남은 철저히 가로 막았다. 이 단장이선수들과 조금만 친해지려고 해도 제지를 받았다고 떠올릴 정도다. 그러나 낙숫물이 바윗돌을 뚫는다고 했다. 중국을 꺾고 코리아가 시상대에 오르는 순간 칼 같이 날카롭던 정보요원들도 정을 아는 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세계선수권이 열린 니혼 컨벤션센터에서 조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하나로 뭉친 것처럼 남북의 정보요원들도 코리아의 승리의 환호했고 이별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 이별의 장소는 일본 도쿄가 아니었다. 우승 트로피를 갖고 서울에서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가진 뒤 판문점을 통해 평양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남북이 합의한 사안이었다. 중국을 꺾고 정상에 오른 남북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1991 4 26일 명지대 학생이었던 고 강경대씨가 구타로 숨진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퍼레이드는 남북이 따로 여는 것으로 정리됐다.

아직 이별의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북측에서 한국에서는 시위가 너무 잦아 위험하다고 반대했어요. 어쩔 수 없이 일본 도쿄에서 헤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