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8일

이탈리아 무솔리니 애인과 함께 처형

산풀내음 2017. 3. 10. 21:17

19454 28,

이탈리아 무솔리니 애인과 함께 처형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 부근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함으로써 2차대전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1945 4 25.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 (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883 7월 29 ~ 1945 4월 28)가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밀라노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스위스. 그러나 둘은 스위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출 이틀 만에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근처에서 파르티잔에 체포돼 좀더 살아보려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려만 주면 제국을 주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용서받기에는 그가 인류에 끼친 악행이 너무 컸다.

 

27일 약식재판을 거쳐 28일 총살형에 처해졌고 시체는 28일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졌다. 다음 날에는 히틀러도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앞서 4 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세상을 떠 2차대전의 주역 네 사람 중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2차대전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성난 군중들이 발길질로 짓이겨서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버린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타치

1945년 이태리 레지스탕스에게 총살된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들이 이태리 밀란에 한 도시에 기차역 앞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 성난 시민들은 시체들에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심지어 권총을 쏘기도 했다.

무솔리니의 정부였던 클라라 페타치(Clara Petacci). 그녀는 무솔리니 보다 29살이나 어렸고, 처형 당시 33세 였다. 무솔리니는 10대 때부터 여성을 성욕의 도구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명의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최고 14명의 여성들과 동시에 성관계를 가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심한 매독에 걸렸고 매독균으로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파시즘이라는 정치사회학적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 무솔리니다. 한 시절 그는 사자후 같은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고 최고 권력을 쟁취하여 이탈리아 역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최고의 인물이자 전 세계 파시스트의 우상으로 숭배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격변과 파란의 연속이었다. 대장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난 무솔리니는 반항적이고 난폭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공부는 1등을 할 정도로 우수했다고 한다. 군대 징집을 피하려고 스위스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만난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사회중의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1904년 이탈리아로 귀국한 무솔리니는 베네치아 알프스 지역에서 교사 생활로 돌아갔으나 염증을 느껴 또 다시 노조 운동, 급진주의 정치노선을 걷는 선동가로 복귀하여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1909년 석방된 무솔리니는 청년 사회주의자로서 다수의 사회주의 계통 신문의 논객으로 활동했다. 그는계급투쟁(La Lotta di Classe)’이라는 언론을 창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12년 사회당 기관지전진!(Avanti!)’의 편집장에 오른다. 무솔리니가 편집장으로 취임하면서전진!’은 반()제국주의 논조를 유지하며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며칠 전까지 반전(反戰)을 주장하던 무솔리니가 갑자기 전쟁광처럼 날뛰자 사회당은 그의 당적을 박탈했고, ‘전진!’의 편집장 직에서도 쫓겨났다.

 

무솔리니는 다시 자신의 언론을 만들었다. 이름은이탈리아 인민(Il Popolo d'Italia)’. 그는 이 언론을 통해 파시즘을 목청껏 외치다 전장에 뛰어들었다. 저격대에서 활동하던 중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무솔리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축에 나섰다. 무솔리니는 대중집회가 열릴 때마다 검은 셔츠를 입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호위를 받았다. 당시 무솔리니 같은 선동정치가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 속에서 이탈리아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2년 사회당 총파업이 개시되자 무솔리니는 천재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무솔리니는 그가 조직한 폭력 행도 조직 "검은 셔츠단"으로 하여금 로마로 진군하여 루이지 파크타 총리가 이끄는 당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태리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인정을 받아 이탈리아 총리에 오른다.

 

March on Rome

 

당시 무솔리니의 최고의 후원자는 카톨릭이었다. 당시 교황 피우스 11세는 무솔리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막대한 정치 경제적 뒷거래가 있었다. 이들 사이에 1929 2 11일 교황이 다스리는 바티칸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끝없는 파업과 소요에 진저리 치던 이탈리아 국민들도 독재적이고 권위적이며 현란한 선동을 앞세운 무솔리니의 선동정치에 열광했다. 그들은 무솔리니를 통해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Monsignor Francesco Borgongini-Duca, Cardinal Pietro Gasparri, Francesco Pacelli, Benito Mussolini, and Dino Grandi at the signing of the Lateran Treaty between Italy and the Vatican, February 1929

 

최고 권력자가 된 무솔리니는 의회를 해산하고, 폭력을 앞세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철권 정치를 했다. 무솔리니가 열광했던 파시즘은 이른바 국가지상주의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이용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재를 합리화하는 반()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국수주의적인 대중 독재를 추구했다.

 

우선 가장 만만한 상대 중에 하나인 알바니아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어서 아프리카에 몇 안되는 독립국가였던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에티오피아는 당시에 한 나라 안에서 수많은 부족들이 대립하여 제대로 단결되지도 았았고, 현대식 군사 훈령도 제대로 받지 못한 군대를 가진 약소 국가였다. 이태리 군은 이미 큰 차이가 나는 군사력의 차이도 모자라 독가스까지 살포하고, 포로들을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지르면서 결국 점령한다. 1935~1936년까지 불과 1년 동안 에티오피아 군인은 27 5천명이 전사하는 대학살에 가까운 비극이 발생했고 이태리 군 역시 1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후에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오르는 후안 페론이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 현장에서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적나라한 선동정치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아르헨티나에 적용하여 권좌에 오른 후 포퓰리즘 정치로 아르헨티나를 수렁에 몰아넣었다.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강철동맹을 체결하면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초기에는 관망하던 무솔리니는 독일 전차군단이 전격전(電擊戰)으로 프랑스 서부전선을 무너뜨리자 1940 6 10일 연합국에게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참여했다.

 

1942년 어느 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에티오피아에 이어서 리비아를 점령하고, 인접한 이집트를 침공하게 되는데 문제는 당시 이집트의 주인은 바로 대영제국이었고 아직 몽고메리가 부임하기 전이었고, 이태리 측에서는 롬멜이 부임하기 전이었지만 마치 벌집을 잘못 건드린 철부지 마냥 영국군의 세찬 반격에 이태리군은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43 5월에 이태리군과 독일군 모두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무솔리니의 역할은 1943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함으로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최고 의결 기구인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7 25, 무솔리니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다.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외무장관인 치아노 백작도 무솔리니에 대한 쿠데타에 가담했다. 그날 저녁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수상 직에서 해임했다. 실각한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아펜니노 산맥의 한 산장에 구금되었다.

 


무솔리니가 감금되었던 캄포 암페라토레라에 그란사소 호텔, 이곳은 아페닌 산맥에 스키 리조트 휴양지였다. 7월에 눈도 오지 않은 이곳은 무솔리니를 비밀리에 감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무솔리니의 구출 직후 - 스코르제니와 독일군 특공대들에게 호위되어 비행기로 이동 중이다.

 

이탈리아가 추축국(樞軸國)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한 히틀러는 특공대를 보내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뮌헨으로 탈출시켰다. 무솔리니는 히틀러가독일에게 이탈리아 전 지역의 점령과 통치를 용인하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여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북부에 독일의 괴뢰정권인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을 수립했다. 이탈리아 반도에 구축한 독일군 방어선이 무너지고 1945 4월 연합군이 북이탈리아로 진격하자 무솔리니는 독일군 사병으로 변장,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트럭 행렬에 몸을 숨겼다.

 

4 26일 밀라노 근처의 동고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빨치산 부대와 조우했다. 독일군복으로 신분을 위장한 무솔리니는 그가 신고 있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정체가 탄로나 빨치산들에게 체포됐다. 4 28일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됐는데, 무솔리니가 남긴 마지막 말은내 가슴을 쏴라였다. 그들의 시신은 밀라노의 거리에 던져졌다. 한 부인은죽은 다섯 아들의 복수를 위해무솔리니의 시체에 권총을 다섯 발 쏘았다. 그들의 시신은 시민들에게 능욕을 당한 후 밀라노의 주유소 앞 광장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