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8일

이기붕 일가족 자살

산풀내음 2017. 3. 10. 21:24

19604 28,

이기붕 일가족 자살

 

1960 4 28일 새벽 5 40, 조용하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구내 36호 관사에서 갑자기 총성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를 듣고 별실에 머물던 이무기 비서가 곧바로 경비실에 연락을 했다. 급히 경비원들이 문을 열었으나 이미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장남 강석, 차남 강욱 등 일가족 네명 모두가 사망한 상태였다. 이들이 일가족 집단자살을 결심한 후 큰아들 이강석이 부친, 모친, 동생을 차례로 쏘고 자살한 것이다.

 

집단 가족자살로 오욕의 삶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모습.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

 

해방 직후 이기붕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미군정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다 당시 군정청 민주의원 의장을 지내던 중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그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때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해진 박마리아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이기붕을 이승만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사방팔방으로 설치고 다녔던 박마리아의 정치적 야심은 하나의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

 

1951 6월 국방부장관에 취임한 이기붕은 미국 관계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이때 부인인 박마리아는 자신의 제자들인 이화여대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미군들 앞에서 팦송을 부르게 강요했다. 제자들을 술집 접대부 수준으로 취급한 것이다.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 콜트 미8군 부사령관. 이들을 초대한 박마리아 여사는 자신의 출신 학교이자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 여학생들을 불러 미국팝송을 부르게 했다.

 

이기붕은 1956년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자 그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1957 3 26일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상납한다. 이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 사이에는 장녀 이강희(이화여중 재학 중 요절), 장남 강석, 차남 강욱이 있었는데 이들 부부는 장남을 이승만에게 생일선물로 바친 것이다. 이기붕은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고 그 후1960 3 15일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는 정치적 야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으며, 양자의 아이디어도 그녀에게서 나왔다. 그녀의 위상도 더불어 하늘을 찔렀다. 박마리아는 1956년 대한부인회 대표 최고위원에 올라 여성계 1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해 이화여대 부총장으로 올라갔다.

 

 

대통령의 양자가 된 이강석은 거칠 것이 없었다. 대낮에 정복 차림의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의 기물을 부숴도 누구 하나 그를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다. 양자가 된 직후 어거지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려다 법대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바람에 무산되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희한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가짜 이강석 사건이었다.

 

1957 8 21일 아침 6시부터 몰아친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해 막대한 수재가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져 거리를 전전하던 22살의 강성병이란 청년이 경상북도에서 가짜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관공서의 대접을 받거나 금전적 혜택을 보는 등 사기를 치다가 들통이 난 사건이다. 대구에서 도지사 관사에 묵었던 '가짜 이강석'은 도지사가 진짜 이강석의 친구인 자기 아들을 내세워 얼굴을 확인한 뒤 경찰에 연락해 체포한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철저하게 '보안'을 지켜가면서까지 이 사건을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매일신문 기자가 검찰에 구속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춰내어 특종 보도했었다.

 

'가짜 이강석' 재판정에는 대구법원이 생긴 후 최대 인파인 1천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왔다. 판사 전용 출입문까지 밀려든 인파 때문에 법정에 들어가던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고 법정 안의 의자 절반이 부서질 정도였다. 득의만만한 '가짜 이강석' 강성병은 방청객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그는 먼저 사기극의 동기에 대해 "언젠가 신문을 보니 서울 명동경찰서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때리고 행패를 부려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강석이라면 무엇이든 통하는 세상이라고 믿었다"고 진술했다. 이어 다양한 주장을 펼쳤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보는 것도 동기의 하나였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사바사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 "이번 체험을 통해 권력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라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이니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 "할리우드 같으면 60만 달러의 연기료를 받을 수 있는데 나는 연기료 대신에 벌을 받게 되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방청객은 물론 뉴스를 접한 전 국민이 환호했다. 그만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발발로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315 부정선거의 표적이 되었고 이기붕의 집앞은 연일 시위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4 25일 교수단 데모로 학생 시위가 재개된 후 시위대가 서대문 자택을 포위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기붕은 잠시 경기 포천의 한 군단으로 피신했다. 그러던 중 4 26일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4 28일 경무대로 돌아와 당시 육군장교였던 장남 강석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했다. 피신 직전까지 그가 살던 서대문 집은 현재 4·19 혁명 기념 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3.15 부정선거


4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가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 참사의 제1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이기붕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이 격노한 데모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처음에 서울에 내려졌던 경비계엄령이 전국적인 비상계엄으로 바뀌어 선포가 되고 경찰을 대신 군인들이 치안의 주역을 맡기 시작하고, 신문 같은 언론매체(그 당시 몇 가지 신문과 국영방송밖에 없었다)에 대한 군 검열이 시작되어서 불온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조판과정에서 삭제 당했다.

비교적 민중 편에 서있었던 계엄군의 느슨한 검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4 19일의 생생한 사진들이 신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식민통치의 상징 중앙청 옆에 널려진 서류들, 불에 타던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서울 의대생들이 숫제 하얀 가운을 입고 데모에 참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의 물건들이 불에 타던 생생한 기록들이다.

무풍지대, 드디어 부상.. 자유당 정권과 손을 잡은 야쿠자 스타일의 이정재 휘하의 정치깡패의 부관들 드디어 여론과 군의 압력으로 얼굴이 들어나고 구속까지 된다. 이들과 동대문 경찰서는 숫제 서로 직통전화까지 가설하고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3.15 부정선거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와 두목격인 이정재는 1년 뒤의 5.16 혁명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만, 운이 좋았던 유지광은 살아 남는다.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새로운 데모는 사실상 계엄군의 보호하에 벌어진 셈이 되었고, 이것은 현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또 다른 총부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결단 4.19 를 진정한 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인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 타고 얼싸안고 있던 사진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멋진 군인아저씨 들이었다. 용기를 얻은 군중들은 서서히 원흉으로 지목된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이승만 정권 궤멸.. 이것이 이제는 공식, 사실화가 되어서 4 27일자 신문의 전면에 나온다. 3.15 부정선거는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 역사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대표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울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거짓된 눈물을 보이며 국민들에게 구차한 생명을 구걸한다.

4.26 대통령 하야 결심소식을 듣고 계엄군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그러나 그들은 또다른 비극의 서막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