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8일

윤필용 사건 보도

산풀내음 2017. 3. 11. 07:08

19734 28,

윤필용 사건 보도

 

1973 428일 석간신문은 당대의 세도가로 위세를 떨치던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이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고 보도했다.

 

1973 4 28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오른쪽)과 장성들.

1973 4 29윤필용 사건 관련 재판 당시 사진. 가운데 인물이 손영길 준장. 오른쪽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경망스러운 자세의 윤필용과 대조적으로 손영길 준장은 의연하다.

 

1973년에 일어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측근 실세들 간에 충성 경쟁과 파워게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1927-2010, 육사8)이 이후락(1924-2009, 군사영어학교 1) 중앙정보부장과의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쇠해 가니 형님도 차기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말이 신범식(1923-1992, 고려대) 서울신문 사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됐다. 신 사장은 박 대통령과 골프를 하면서 윤 장군이 이 부장에게 했던 말을 흘렸다.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박 대통령은 곧바로 강창성 보안사령관(1927-2006, 육사 8)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강 사령관이 윤필용 장군은 물론 그의 부하와 군대 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 가혹한 조사와 조치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 뿐만 아니라 손영길 준장(육사 11, 1932- )을 포함한 장성 3명과 장교 10명에게도 징역형이 내려졌고, 이로 인해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다.

 

1980년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강창성 장군은 모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일로 고초를 겪은 강 장군은 후에 정계로 들어가 국회 5공 특위 위원이 되어 윤필용과 전두환 장군을 추궁하는 위치가 됐다. 동기생 윤필용과 강창성 장군의 악연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5사단장 시절에 만난 윤필용을 총애하여 7사단장, 1군 참모장, 군수기지 사령관, 1관구 사령관 등 새로운 보직을 맡을 때 대부분 윤필용을 데리고 갔다. 5·16 군사반란 당시 윤필용은 이른바혁명주체가 아니었지만,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인연 덕분에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또는 비서실장 대리로, 육군방첩대장, 수경사령관으로 20년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보좌했다.

 

1968 10월 주월 맹호부대(수도사단) 사단장에 임명된 윤필용 소장(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출국 인사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계원 육군참모총장과 조상호 비서관.

 

윤필용은 육군방첩대장으로 있던 1965 5월 원충연 대령 등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1960년대 초반에 발생한 수많은 반혁명사건은 사실 모두 조작된 것인데, 원충연 사건만큼은 병력 동원이 계획된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원 대령은 이 사건으로 1966년 사형을 확정받았다가 이듬해 무기징역, 1969년 징역 15년으로 감형을 받은 뒤 1981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1984년 캐나다로 건너간 원 대령은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 등 고통을 겪다 2004 83세로 별세했다.

 

1968 1·21사건 당시 윤필용은 이북에서 침투한 특수부대원 김신조를 생포한 당일 방첩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했다. 여기서 김신조는 침투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박정희 모가지 따러왔시오라고 답하여 충격을 주었다. 윤필용은 며칠간 김신조에게 전향교육을 시킨 뒤 깔끔한 옷을 입혀 같이 텔레비전에 나와 그가 얼마만큼 자유대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과시했다.

 

김형욱(1925-1979, 육사 8)의 중앙정보부는 윤필용이 전과를 과시하려고 무장공비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아우성을 쳤다. 참고로 김형욱은 중령으로 5.16에 참여하였고 1963년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1964년 인혁당 사건, 1967년 동백림 사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등 박정희가 원하는 악역을 수없이 대신 처리했다. 그러나 1969년 박정희는 김형욱을 해임하였고 이에 앙심을 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저격수가 되었다. 1979 10 7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꾐에 빠져 파리에 갔다가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김형욱

 

육사 8기 중 처음으로 별을 달고 소장으로 진급한 윤필용은 1970 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 청와대 경호실장은 박종규(190-1985, 육군종합행정학교 및 건국대), 보안사령관은 김재규(1926-1980, 육사 2)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까지 4인이 박정희 체제를 물리력으로 떠받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들 네 측근을 적당히 경쟁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권력을 관리했다.

 

육사 기수로는 2기인 김재규가 8기인 윤필용보다 한참 선배였지만, 나이는 1926년생인 김재규가 윤필용보다 한 살 많았을 뿐이다.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은 윤필용의 과감한 공격으로 끝이 났다. 수경사 내의 보안부대가 자신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음을 눈치챈 윤필용은 1971 8월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경사 영내의 보안대 사무실을 폐쇄하고 도청 테이프를 압수했다. 김재규는 한 달 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되어 3군단장으로 나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내에서 윤필용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박정희와 함께 하고 있는 김재규 (좌측)

 

윤필용이라는 이름은 점차 정치권을 넘어 대학가에까지 알려졌다. 1971 930일 고려대학교에서는 대표적인 부정축재자 3인으로 이후락, 박종규와 함께 윤필용을 꼽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며칠 후인 105일 새벽 수도경비사 헌병 30여명이 고대에 난입하여 학생 5명을 수경사로 연행해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대학가의 규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결국 10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유신을 단행하기 이전에도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금 치고 나간다 싶으면 다른 측근들의 견제가 집중되었다. 김종필(1926- , 육사 8) 세력이 칼을 맞았고, 김성곤 등 4인 체제(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도 몰락했다.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1972 5월 이후락이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자 그의 대중적 인기는 크게 치솟았다. 유신의 기획과 실행 과정에서 이후락의 역할은 뚜렷했다. 이 사건은 이후락의 명성과 권위가 올라가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박정희의 견제 또는 제거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2 5 4일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한 이후락(왼쪽) 중앙정보부장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했으나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고 그와 손을 잡았다. 수경사 참모장이던 준장 손영길은 이후락의 울산농고 후배이기도 했다. 1957년에 박정희의 전속 부관이 된 이래 박정희, 육영수 부부의 총애를 받아온 손영길은 박정희 체제의 버팀목이어야 할 중앙정보부장과 수경사령관이 불편한 사이여서는 안 된다고 보고 둘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1972 5 4일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한 이후락(왼쪽) 중앙정보부장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했으나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고 그와 손을 잡았다. 수경사 참모장이던 준장 손영길은 이후락의 울산농고 후배이기도 했다. 1957년에 박정희의 전속 부관이 된 이래 박정희, 육영수 부부의 총애를 받아온 손영길은 박정희 체제의 버팀목이어야 할 중앙정보부장과 수경사령관이 불편한 사이여서는 안 된다고 보고 둘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의 박종규

5.16군사쿠데타 당시의 박종규, 박정희, 차지철 (왼쪽부터)

 

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 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신범식은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정희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불경스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해 바친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 어느 정도 관여된 부분은 인정하지만, 다만 그는 골프장에서 박정희에게 윤필용 이야기를 한 것은 유신 직후인 1972 10월 말이고, 사건이 터져 윤필용이 잡혀간 것은 이듬해 3월로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정희로부터 윤필용을 조사하고 필요하면 이후락도 잡아들이라는 특명을 받은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뒤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동기생인 윤필용을 구제하고 사건이 이후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변명하지만, 실제 일이 진행된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윤필용 장군 전속부관이었던 예비역 소령 정봉화(육사 18)씨가 쓴 자서전 <신작로에 남겨진 발자국>에 따르면, 강창성은 겉으로는 윤필용을 돕는 척하면서 도청장치를 한 음식점으로 윤필용을 불러내 유도심문을 하고 그 내용을 보안사에서 적절하게 가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1972년 보안사령관 시절 강창성() 1992년 민주당 국회의원 시절 노무현과 함께()

 

윤필용은 크게 보면 쿠데타 음모, 작게 보면 불경죄로 잡혀갔지만, 박정희와 강창성은 그를 파렴치한 부정축재자로 처벌했다. 박정희의 여색을 거론한 괘씸죄 때문인지 사건의 판결문이나 배경에 대한 해설은 이들이탕녀나 유녀들과 어울려 방탕생활을 일삼았고, 치부와 엽색행각을 했다며 ‘1951년도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된 국민방위군사건 피고인들이 무색할 인면수심의 향락을 만끽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75년 석방되었고, 1980년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집권하자 전두환의 도움으로 한국도로공사 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죽은 직후에 아들인 미주제강 회장 윤해관이 재심 청구를 하여서 보안사의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강창성은 윤필용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로 윤필용이 후견인 역할을 하는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강창성은 사건을 확대하여 하나회도 본격적으로 수사했다.

 

하나회는 육사 11중 영남 출신 생도,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등 5명이 5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이다.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5성회는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확대 개편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손영길은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전속부관으로 2년 반 동안 모신 바 있으며 이 때문에 박대통령이 많이 총애하던 인물이다. 전두환은 처음에 하나회를 만들 시 박정희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를 영입했다.

 

12.12 당시의 하나회

 

수경사 참모장으로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던 손영길은 하나회 관련 인물임과 동시에 이후락의 고교 후배로 이후락과 윤영필을 연결시켜준 대가(?)로 이 사건과 깊게 관련되었다. 손영길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위관장교 시절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그들을 구명해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밖에서 구명운동에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손영길이 곤경에 처했을 때 전두환은 그 자신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고 손영길의 구명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강제 예편 당했다. 1976년 만기 출감했고 사건이 있은 후 38년이 지난 2011 1 20,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되찾았다.

 

전두환과 노태우도 당시 위기에 빠졌지만 박종규와 서종철(1924-2010, 육사1, 당시 국방부 장관), 진종채(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로 전두환의 전임 보안사령관) 등 영남 출신 장성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강창성을 보안사령관에 그대로 두면경상도 장교의 씨가 마르겠다며 박정희 자신이 군대 내의 친위대로 육성한 하나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윤필용을 잡은 강창성은 영남 군벌의 반격으로 1973 8월 보안사령관에서 밀려나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76년 예편되었다. 아무리 피의자라지만 일국의 장성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한 강창성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한 뒤 전두환은 1980년 여름 강창성을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여 고문을 하고 나서 삼청교육대에 보내 버렸다. 무려 2년 동안 4번에 걸쳐 삼청교육대에서 혹독한 수난과 함께 2 6개월간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이후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5공 특위에 관여하게 되었다.

 

윤필용 사건과 관련해 고초를 겪은 민간인으로는 당시 제일은행 후암동지점 차장이었던 이원조와 한양대학교 총장인 김연준이 있었다. 이원조는 노태우와 고교 동창이며 전두환과도 이전부터 잘 알고 지냈고 이를 계기로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과 자주 어울린 것이 화근이 되었고, 김연준은 윤필용과 친하게 지낸 것이 화근이 되었다.

1공수여단장 전두환은 이원조가 잡혀갔다는 이야기에 당황하며 한동안 부대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은 부대 내에 칩거하면서 박종규와 연락했고 박종규를 만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원조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9월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대통령비서실 소속 경제비서관이 되었다. 1986년 은행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감독원장에 취임했으며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던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민정ㆍ민자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당시 막강한 정치자금 동원력을 과시하면서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다. 1995년 노태우 대통령의 수천 억대 비자금 조성 사건에 연루된 그는 뇌물을 모아 전달한 혐의가 인정돼 대법원에서 징역 26개월의 확정 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가 2000 8.15특사로 사면 받았다.

 

친구를 잘 둔 이원조()

 

사실 윤필용 사건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박종규였다. 1973년 권력다툼을 하던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이 윤필용 사건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실각하자 2인자 노릇을 하였다. 이 때, 윤필용과 이후락을 몰아내고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윤필용 사건을 크게 키웠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1974 8 15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인하여 경호실장에서 물러났다. 1978 12월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10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80 5월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고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이후 죽기 전까지 IOC 위원으로 지내다가 1985년 별세하였다.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 당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1974 8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