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8일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산풀내음 2017. 3. 10. 21:33

19674 28,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세계헤비급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가 텍사스주 휴스턴 징병국의 육군입대명령을 거부했다. 1967 4 28일 휴스턴 징병국에 출두한 클레이는 신체검사에서 합격했지만, `자신은 아랍 모슬림의 선교사`라며 정부가 일반 목사의 병역을 면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징병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On this date April 28, 1967, Muhammad Ali was stripped of his WBA Heavyweight Title after refusing to be inducted into the U.S. Army.

 

WBA는 즉각 클레이의 타이틀을 취소하는 등 클레이의 병역거부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6월 휴스턴연방지구재판소는 클레이에게 5년의 금고와 1만달러의 벌금형을 판결했다. 한편 클레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반전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무하마드 알리. 스포츠라면 통 관심 없다고 손사래를 쳐대는 이들일지라도 이 전설적인 복서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후세대 농구 스타 마이클 조든과 함께 프로 스포츠사를 통틀어 미국이 만들어낸 가장 유명한스포츠 우상이었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 1월 17 ~ )켄터키 루이빌에서 태어났으며, 1964 맬컴 엑스 등이 이끄는 이슬람운동에 가담하기 전까지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고향에 금의환향 했지만 동네 식당에서조차 식사제공을 거절당하며 변함없이 '깜둥이'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울분을 느껴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에 던져 버린다. (IOC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 때 새로 제작한 금메달을 그에게 선사한다.) 그는 '백인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길 거부했다.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언제나 직설적이었기에 그에겐 '루이빌의 입(The Louiville Lip)'이란 별명이 붙었다. 우리에겐 '떠벌이 알리'로 알려진 그다.

 

 

그는 1964년 도박사들의 17 열세를 비웃으며 소니 리스튼을 KO로 누르고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1960~70년대 그의 인기는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던 비틀즈의 인기를 뛰어 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당시가 미디어의 유아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전지구적 인기는 가히 괴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백인들 앞에서는 말수가 적어야 한다는 종전 흑인 복서의 불문율을 깨고 그는 유머 넘치는 수다와 쇼맨십으로 사랑받았다. 힘과 덩치만 강조되던 헤비급의 링 안에서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경쾌한 발놀림과 빠른 펀치로 세계 권투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딴 순간, 그가 선언한 한마디는 백인 중심의 당시 미국사회에 대한 공공연한반기로 기록된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한술 더 떠 이 떠버리 복서는 급진적 흑인운동가 말콤 엑스와 공공연히 교류했고이슬람 네이션활동에 가담했다.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라는 기독교적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슬람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미국의 우상은 단숨에미국의 골칫거리가 되어 미국 주류 사회를 가격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7년 징집되자 그는 죄 없는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그런 전쟁에 내가 왜 가야 하냐면서 기자들을 향해 "이보쇼, 난 베트콩하고 싸울 일 없어요(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 댈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징병 거부가 불량한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죄악시 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알리의 징병 거부는 반전운동의 불씨가 된다. 그는 영화, 음악, 스포츠계를 망라해 징병반대와 반전의 기치를 내걸었던 최초의 인물이었고, 결국 반전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그 댓가는 엄청났다. 챔피언벨트는 물론 선수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무려 3 6개월간 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징병거부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 끝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는다.

 

링에 복귀한 알리는 1974년 자이레 킨샤샤에서 26세의 챔피언 조지 포먼과의 '세기의 대결'을 벌인다. 당시 전문가들은 알리가 포먼의 주먹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염려했고 알리의 담당의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스페인의 뇌수술전문병원으로 알리를 실어 나를 비행기를 킨샤샤공항에 대기시켜 놓기도 했다. 그러나 알리는 로프에 기대어 포먼을 탈진시킨 뒤 8회 불꽃 같은 원투펀치를 포먼의 얼굴에 작렬시켜 격침시켜 버린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스타의 탄생이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최종 성화 점화자로 등장하여 손을 떨면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그의 딸 라일라 알리도 여자 프로 권투선수로 활약했고 세계 챔피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며 그 아버지에 그 딸임을 보여주었다. 라일라는 2007년 이후 은퇴한 상태. 여담으로 라일라는 무하마드 알리의 세번째 부인이었던 베로니카 포셔 알리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흑인은 못생겼다'는 잘못된 생각이 판을 치던 당시에도 흑인 여성 베로니카는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았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에도 딸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등장. 원래는 올림픽 오륜기 게양식에 같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건강상 문제로 오륜기를 만져보는 것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