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아내와 함께 자살

산풀내음 2017. 3. 11. 22:41

19454 30,

아돌프 히틀러, 아내와 함께 자살

 

 

 

 

나치스의 지도자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끔직한 전쟁을 유발시킨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1945 4 30일 패전이 분명해지자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틀 전에 결혼한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도 그 옆에서 음독자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세운 독일 제3제국도 인류에 고통 만을 남겨둔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원인 알로이스 히틀러의 6남매 중 4째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 4월 20 ~ 1945 4월 30)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빈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지만 이내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예술가의 길을 포기했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에 빠졌고, 결국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1913년 뮌헨으로 갔다. 이유는 오스트리아군 징집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당시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사실은 슬라브족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독일인과 기타 민족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1914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바이에른 16보병연대에 입대를 자원했고, 독일 군인의 최고 영예인 철십자상을 받았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19 9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 당원증 제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 ,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1 7월에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나치스당 당수로 선출됐다.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당로마 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 11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지만,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그 사건으로 베르세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9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1929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 4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 후보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이후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 1월 30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1932년 선거에서 이겨 1933년 총리로 지명되면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점차 권력을 강화해 나간 히틀러는 1934 8 대통령 파울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총통(Führer)이라 칭하였다.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 6월 30에는 장검의 사건을 일으켜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을 제거한 데 이어서 바르톨로메오의 사건을 일으켜 권력 등 모든 비밀을 알고 있던 전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을 제거하면서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히틀러는 1939 9월 1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의 광적인 세계 제패의 꿈은 급기야 1941년 소련과의 전쟁을 통해 후퇴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German Chancellor Adolf Hitler speaks to Nazi party officials in 1939, the year of the German blitzkrieg into Poland.

 

 

 

 

 

 

 

 

 

40시간 히틀러의 부인으로 산 여인, 에바 브라운은 누구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gY6-NuzSUJA&t=56s

 

에바 브라운(Eva Anna Paula Braun, 1912 2월 6 ~ 1945 4월 30)바이에른의 주도 뮌헨 태생으로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재봉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대체로 평범한 학생으로 여겨졌지만 체육 과목에서만큼은 다른 학생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후 1차대전의 패전과 뒤이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17살 때 어느 사진관에서 조수 겸 점원으로 고용되어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진관의 운영자가 바로 나치 공식 사진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이었다.

 

 

 

 

이를 계기로 에바 브라운이 히틀러와 처음 만난 것은 23살 때인 1929년이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브라운은 일편단심 히틀러를 사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당시 자신과 외종조카딸 관계였던 겔리 라우발(Angela Maria "Geli" Raubal, 1908 6 4 ~ 1931 9 8)과 동거하고 있었다.

 

겔리 라우발의 어머니 안젤라 라우발은 아돌프 히틀러의 배다른 누나이다. 과부로 살던 안젤라는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Obersalzberg)에 셋집을 얻은 후 자신의 집에 와 집안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1928년 딸과 함께 히틀러의 집으로 이주했다. 40살이 된 히틀러는 조카 겔리에게 매혹되었으며 그가 어린 조카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겔리에게 극도의 집착을 보였고 역시 겔리에게 관심을 보인 운전사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해고되었다.

 

 

 

겔리 라우발과 히틀러

 

두 사람은 2년동안 동거를 했다. 겔리와의 관계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상대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며 비난하고 다투었다. 겔리는 특히나 에바 브라운에게 신경을 썼는데 당시 17살이던 에바 브라운은 종종 히틀러와 함께 벤츠에 동승하곤 했다.

 

겔리는 또한 히틀러가 그녀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1931 9 8, 히틀러는 비엔나에 가고 싶어하는 겔리와 격심한 말다툼을 벌인 후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는 차에 타기 전 겔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안돼!” 히틀러가 떠난 후 겔리는 리볼버 권총으로 심장을 쏘아 자살했다.

 

 

 

 

The unresolved and hastily covered-up death in 1931 of Geli Raubal, Hitlers half-niece and romantic obsession, has long been relegated to the murky footnotes of the Führers early career in the demimonde of Munich.

http://www.vanityfair.com/news/1992/04/hitlers-doomed-angel

 

히틀러는 오페라에 초대하고 싶다. 나는 남자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는데 당신같은 여성을 만난 행운을 감사하고 싶다고 에바 브라운을 유혹했다. 영화와 패션에 관심이 많던 순진한 에바는 대량 학살자의 이런 모습에 넘어가고 만다. 히틀러는 그녀를 만난 후 조상 중 유태인이 없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에바와 히틀러

 

 

그들의 이런 연애행각이 언제 심각한 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1932년 브라운은 그녀 아버지의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히틀러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겔리 라우발에 이어 히틀러와 관련된 여성의 두번째 자살 사건이었다. 물론 에바 브라운은 죽지 않았다.

 

에바는 공식적인 배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권력이 커져가면서 점점 에바에게 소원해졌다. 1935년에는 오랜기간 동안 에바를 방치했다. 몇 달 동안 에바는 히틀러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없었다.

이에 1935년 브라운은 수면제를 먹고 두번째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 역시 히틀러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얼마 후 히틀러는 그녀를 부모의 집에서 나오게 해 베르그호트에 있는 바바리안 휴양지에 보내고 거기서 에바는 히틀러의 '풀타임' 정부가 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그중에서 독일의 유명한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Berta Helene Amalie "Leni" Riefenstahl, 1902-2003)도 있었다.

 

 

 

레니 리펜슈탈과 히틀러

 

하지만 두번째 자살 소동 이후 브라운은 최고위층 모임에도 서슴없이 들어와 히틀러에게 저녘을 먹으라고 할 정도로 스스럼이 없었다. 그녀의 앨범에 남아 있는 그녀가 찍은 사진과 정황으로 볼때 에바 브라운은 정치적인 모임에도 참석이 허락되었으며 히틀러의 세계관과 정치관을 비판없이 공유했을 것이다.

 

죽기 40시간 전 베를린 벙커에서 히틀러는 에바에게 자신과의 결혼을 선물한다. 그리고 에바 브라운은 자신의 이름을 에바 히틀러라고 서명한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40시간 후 이 두 사람은 자살로 생을 마친다.

 

 

 

 

그의 자살과 관련하여서는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많다.

 

https://www.youtube.com/watch?v=K3wTU22Fwfo&t=7s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서 구소련에 패하면서 어두운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 그리고 1945 4 30일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고, 에바는 청산가리 캡슐을 삼켰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히틀러의 나이 57세였다.

 

히틀러와 에바의 시신은 소련군이 화장시켜 벙커 위의 마당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옛 동독 마그데부르크의 소련군 부대 내에 하고 턱뼈와 두개골 조각 등 유해 일부만을 현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보관하게 됐다고. 여기까지가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기록이다.

 

 

1) 여성의 두개골? 히틀러가 여성??

 

1945 5 3일 독일을 함락시킨 소련군은 히틀러의 유해를 찾아낸 뒤 신원확인을 위해 히틀러의 주치의를 찾았다. 시신의 치아로 진짜 히틀러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주치의의 조수만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조수를 통해 치아가 히틀러의 생전 치료기록과 일치한다는 확인을 받았다. 이렇게 소련군은 치아의 주인, 즉 총상이 있는 시신을 히틀러의 것으로 확신한 뒤 사인을 권총자살로 결론지었다. 이어 지난 2000년 히틀러의 두개골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공개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논란은 재점화됐다. 2009년 미국 코네티컷대학의 고고학자 닉 벨란토니 교수와 유전학자 린다 스트로스보 교수가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총알구멍이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였다. 이 과정은 최근 미국에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기도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두개골의 DNA분석 결과, 20~40세 여성으로 밝혀진 것. 그 두개골은 DNA 뿐만 아니라 두께 등에 있어서 육안상으로도 확연히 여성의 특징을 보였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문제의 두개골

 

이에 대하여 첫째 두개골이 에바의 것이라는 것과 둘째 히틀러가 여성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에바는 권총 자살이 아닌 음독 자살에 무게가 실리고 있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는 듯하다.

문제는 두번째 주장인데, 근거는 히틀러가 키가 165cm로 자고 좁은 어깨에 엉덩이는 크고 걸음걸이 또한 여성스러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의 콧수염은 자신을 위장하기 위하여 붙인 장치였고 히틀러가 주치의를 통해 남성 호르몬 주사를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신체 특징인 키가 작고 어깨가 좁은 것 등으로 여성이었다고 단정짔기에는 무리가 있고, 남성호르론 주사를 맞은 것은 전쟁 중 한 쪽 고환을 잃어 남성호르몬을 보충하기 위했다는 주장이 있어 이 또한 100% 받아 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2) 아르헨티나 망명설

 

히틀러의 죽음을 명확히 입증할 법의학적 근거는 현재로선 없다. 죽음에 대한 의문을 파헤칠수록 오히려 미궁이 더 깊어지는 이유다. 히틀러의 죽음을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품인 해골이 가짜라면 시작점부터 되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혹시 히틀러는 1945 4 30일에 죽지 않았던 건 아닐까?

 

다수의 음모론자들은 권총자살의 형태로 숨진 이는 히틀러와 닮은 대역이었고, 진짜 히틀러는 다른 나라, 구체적으로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고 믿는다. 패망에 대비해 일찍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뽑아 대역을 맡겼고, 자신은 에바와 함께 특별한 루트를 이용해 해외 도피에 성공했다는 시나리오다.

 

 

 

 

 

 

아르헨티나 도피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1945년 소련군에게 생포된 히틀러가 스탈린과 모종의 비밀협정을 맺고 잠수함을 이용해 라틴아메리카로 탈출했다고 설명한다. 아르헨티나 외곽의 한 독일인 소유 호텔에서 히틀러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어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에 관해 광범위한 저작을 남긴 영국의 역사학자 겸 저널리스트 제라드 윌리엄스와 사이먼 던스틴도 2011년 저서 ‘회색 늑대: 아돌프 히틀러의 탈출’을 통해 앞선 주장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히틀러와 에바가 2차 대전 막바지에 독일을 탈출해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고, 슬하에 두 딸을 두고 1962년까지 살다가 73세를 일기로 숨졌다고 적시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히틀러 부부를 봤다는 수많은 목격자들의 이야기도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2012 1 20, 옛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고위 관계자가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사망했으며 그가 라틴 아메리카로 도주했다는 가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밣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