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30일

이승만 정권, 경향신문 폐간명령

산풀내음 2017. 3. 11. 22:50

19594 30,

이승만 정권, 경향신문 폐간명령

 

경향신문은 자유당 정권에 대해 어느 신문보다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국민들에 대한 영향력이 높았을 뿐 아니라 자유당의 정적(政敵)민주당 장면을 지지하는 당파성을 가지고 있어 ‘야당의 대변지’로 불릴 정도로 정부 비판 논조의 기사를 실었다. 정부는 당시 가장 격렬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 대해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해 1959 4 30일에 폐간명령을 내렸다.

 

경향신문 폐간의 표면상 이유를 밣힌 공보실장의 담화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단기4292(1959) 111일자 사설에서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제목하에 이기붕 국회의장은 병구(病軀)를 끌고 스코필드 박사를 친히 방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근력이 있었다 하거니와 그 동기는 아마도 스코필드 박사가 시내 모지에 기고한 극히 격렬한 비판문 때문이었을 것이며, 박사가 의장의 권고를 격분한 어조로 거부한데 대하여 어떠한 양심의 찔림을 받았는지 알고싶은 일이다라고 전혀 허위의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동시에 정계의 혼란을 조장하였으며,

 

이 사설은 국가보안법 파동을 수습하는 데 있어 정부와 여당인 자유당의 무성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중심이다. 그러나 사설 내용 중 “이기붕 국회의장은 병구를 이끌고 스코필드 박사를 방문하여 돌아가도록 권고했다”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이기붕과 스코필드는 모두 사설에서 지적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했으며, 경향신문은 12일 사고(社告)를 통해 사설 부분을 모두 취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경향신문 1959 1 11일 사설

 

2) 24일자 조간 여적란을 통하여 헤멘스 교수의 『다수의 폭정』이란 논문을 인용함에 있어 이를 견강부회하여 폭력으로 된 혁명에 의할지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동시에 폭동할것을 선전하였으며,

 

문제의여적칼럼은 1959 24일자에 실린 글인데 같은 신문에 연재 중인 페르디난드 A 허맨스 교수(미국 노트르담대학)의 글을 논평하는 내용이었다.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라는 그의 글에는 주목할 만한 견해가 담겨 있어 국내에서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여적의 필자는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좀 강성의 논조를 펼쳤다. 그 첫머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허맨스 교수에 의하면다수결의 폭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설을 보는 한국의 다수당은 아전인수로 해석하려고 달려들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그의 주장 속에는 하나의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즉인민이 성숙되어 있어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요, 바꾸어 말하면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며….”

 

여적은 그 다음 대목에서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되느냐의 원시적인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한 데 이어물론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적 원칙인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라고 맺는다.

 

이승만정부는 이 단평을 “혁명에 의해서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을 선동했다”며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폭력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경찰은 217여적필자인 주요한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담당 조인구 부장검사)은 주요한과 한창우를 내란선동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한편 강영수 국장은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짓는다. ‘여적칼럼은 내란선동으로,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란 기사(1959 111일자)는 이기붕과 스코필드 박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향신문 1959 24, 여적

경향신문 폐간 당시 여적을 쓴 주요한.

 

3) 216일자 동지3면에 『사단장은 기름팔아먹고』라는 제목하에 당지(홍천)모사단에서 거년 12월 중순경 (린제(麟蹄)주둔당시) 사단장 박모준장은 군수참모(최중령)와 합의 하에 휘발유 사백여 드럼 (시가 오백여만원)을 인제 제일주차장 및 원통 속초 홍천 등 지에다 1 드럼에 일만이천원씩 매각한 사실이 있어 예하 장병들의 비난을 받고있다의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허위 사실을 보도하였으며,

 

4) 43일자 조간3면에 『간첩 하를 체포』라는 제목으로 성북서에서는 2일 대남간첩 하모(45)를 체포하는 동시 미화 일천불을 압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일전 지하운동의 밀령을띠고 밀파된 괴뢰간첩이라고하는데 구체적인 공작상황과 접선인물을 계속 추궁중에 있다라는 기사를 당국의 게재금지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의로 게재함으로써 간첩 하모와 앞으로 접선하기로 되어있는 간첩들의 도피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5) 415일자 석간에 이대통령 기자회견내용을 보도함에있어 국가보안법개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법개정도 반대」라는 제목으로 국가원수의 발언을 허위보도하는 등 수차에 걸친 중대한 위법사실을 범하였을 뿐만아니라 그 폐해를 더욱 조장하는 듯한 행동으로 나오고 있음은 사회의 안녕과 공공의 복리에 중대한 관심을갖는 국가와 정부의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우기 경향신문은 재단법인 천주교서울교구유지재단에 의하여 운영되는것으로서 불행히도 그 논조가 천주교 본래의 교지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정치체제 하에서는 종교와 정치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동하여 절제 없는 정부비난과 허위보도를 계속해 오고 있음은 실로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반성을 촉구하고 시정의 언약을 받았으나 개과의 빛이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도를 가하여 언론의 정도에서 더욱 이탈되어 가고 있음은 실로 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정부의 초강경 조치에 대한 국내외의 반향은 경악과 비난으로 넘쳐났다. 우선 군정법령 제88호가 위헌이고 언론자유에 대한 극한적 질식이라는 각계의 성명과 집회가 연달았다. 다울링 주한 미국대사까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군정법령 제88호는 1946년 당시 한국의 치안을 위협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파괴 선전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며 언론에 대한 탄압이 언론의 과오를 바로잡는 방책은 되지 못한다고 정부의 조치를 비난했다. 미 국무부도 다울링 대사의 성명을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외에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등 언론단체와 대한변호사협회 등 각 분야의 사회단체에서 항의 성명이 나오고 국회에서도 전성천 공보실장에 대한 파면 결의안이 나오는 등 반대 공세가 확산되었다.

 

AP통신은 517일 서울발로 이렇게 보도했다. ‘이번 폐간조치는 내년(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 승리하기 위해서 취해졌으며, 자유당은 언론의 비판을 침묵시키는 등 가혹한 수단만이 1960년 선거 승리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경향신문의 폐간에 대해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야당지거나 중립적인 신문들은 정부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전보다 반정부적인 보도와 논조가 부드러워진 것을 보면, 경향신문 폐간을 통해 언론의 기를 꺾어 놓자는 정부여당의 기본 책략이 주효했다고 있다.

 

경향신문이 폐간통지를 받자 발행인 한창우는 바로 법적투쟁에 들어갔다. 한창우 사장은 마침 폐간통지를 받기 몇시간 전에 자유당의 2인자이자 민의원 의장인 이기붕을 만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야간열차편으로 진해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폐간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창우 사장은 부산에서 내려, 기자들에게법대로 싸우겠다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경향신문 측은 1955 55일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처분(발행허가 취소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주장은 고등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경향신문은 1959 9 1일에 가처분 기각 결정에 불복 항고를 하고 이어 10 5일에 본안 소송 기각에 불복 상고를 하게 된다.

 

대법원이 뒷짐을 지고 있는 동안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분노하고 항거하는 시위가 전국화되어 급기야는 4·19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경무대 앞 발포로 많은 시민과 청년 학생들이 쓰러지는 참극을 고비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날이 바로 426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250분 대법원은 허겁지겁 경향에 대한 발행정지처분의 효력정지 가처분 결정을 했다. 이러한 법원의 늑장으로 경향은 1년이란 긴 공백 끝에 겨우 신문을 다시 낼 수 있게 되었다. 폐간된지 361일 만인 1960 427일자 조간부터 복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