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30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미망인 이방자 여사 별세

산풀내음 2017. 3. 11. 23:32

19894 30,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미망인 이방자 여사 별세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영친왕) 이은의 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 4 30일 창덕궁 내 낙선재에서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여사의 죽음은 파란 많은 조선왕조 5백년 역사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왕녀로 태어나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눈을 감은 이방자 여사의 88년 인생은 이 여사가 평소 즐겨쓰던 문구처럼대공무아(大公無我)’ 한 것이었다.

 

이방자 여자(李方子, 마사코, 1901 11월 4 ~ 1989 4월 30)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 守正)와 그의 부인 이쓰코(伊都子) 2녀 중 장녀로 토쿄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의 이름은 나시모토 마사코 (梨本方子)였다.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마사코가 되었고 한국식 발음으로 이방자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발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학습원 시절 동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황족 내에서 그녀 집안의 정치적 영향력은 다소 약한 편이었다. 히로히토(1901-1989, 1926 12 25일 왕에 재위)의 황태자비를 간택할 당시 이방자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됐지만 정치적 배경과 불임의 가능성으로 밀려났다.

 

이후 조선의 왕태자 이은(1897 10월 20 ~ 1970 5월 1)과 그녀의 약혼에 관한 논의는 당사자들은 전혀 모른 채 급물살을 탔다. 이방자의 자서전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약혼이 언론을 통해 발표될 당시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다.

“……이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왕세자 전하와 약혼을 하다니! 약혼 사실을 신문에서 알게 되다니!’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다른 한쪽인 이은(영친왕)의 경우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이은이 일본인과 강제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고종황제엄귀비1907 10월 이은을 민갑완과 약혼시키고서 서둘러 혼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약혼을 깨버렸다. 당시 관습상 황실과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은 다른 곳에 시집갈 수도 없었다.

 

민갑완은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이 치뤄지고 3개월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부친 민영돈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민갑완은 책과 뜨개질로 세월을 보냈고, 이후 여러번의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5 8월 15 광복 이후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할때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고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일본으로 떠나기 하루 전인 190712 4. 낙선재를 나선 조선의 황태자 이은은 궁중의 어른들께 마지막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해 덕수궁에 입궁했다. 아버지 고종이 그에게 글귀를 적어주며 묻는다. “아기야, 너는선천하지우이우 (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 (後天下之樂而樂)’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느냐.”

총명한 이은은 금세 뜻을 파악하고 아버지에게 답한다. “천하의 걱정은 먼저 시작하고, 천하의 낙은 나중에 즐긴다는 말이옵니다.”

영리한 아들의 모습을 본 고종은 대견한 표정으로 아들에게 때를 기다리라는 의미의참을 인()’ 한자를 하사했다. 영친왕 이은은 그렇게 외압 속에 일본에 건너갔다.

 

1916 8월 당사자는 알지도 못한 가운데 약혼이 발표되었고, 신문에는 고종의 기쁨, 조선인 또한 폐하의 배려에 감격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고 이튿날에는 이 혼약을 반기는 이완용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선전을 최대화할려는 노력을 하였다.

 

약혼 발표 후 처음 몇 달 동안 이은과 이방자는 모두 정신적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방자가 이듬해 이은의 저택을 방문하고 그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둘의 감정은 조금씩 무르익었다. 이방자의 자서전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에는 당시의 상황과 심정이 녹아있다.

“…뵙기만 하면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뜰을 산책하거나 때로는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트럼프 놀이를 해보거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두 번보다 세 번, 세 번보다 네 번, 서로 만날 때마다 마음과 마음이 접근하고 접촉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 재학 중에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었고, 고등과에 진학하였으나 결혼 준비를 위해 중퇴했다. 그리고 약혼 4년 뒤인 1920 4 28일에 결혼했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제는 황실전범의 내용을 고쳐 "황족 여자에 한해 왕공족과 결혼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같은 해 이은은 육군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당초에는 1919년에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지만 고종황제의 서거로 결혼식은 1년이 연기되었다.

 


1923년 육군대학 졸업 당시

 

조선측의 의사를 무시한 결혼에다가 전래가 없는 두 나라 왕실의 결혼이라 두분의 결혼생활에 대하여는 꽤 걱정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두분의 관계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제의 악랄함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이방자 여사가 임신하자, 그녀가 불임이라고 보고했던 의사들은 전원 할복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한 불임설을 알고 있었던 이방자 여사는, 일본 정부 측이 조선 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자신을 영친왕과 결혼시킨 거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비록 일본의 불순한 의도로 이루어진 정략 결혼이었고 불임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1921, 장남 진()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1931, 둘째 구()를 낳았다.

 

진 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와 둘째 구 왕자와 함께()

1922년 조선에 일시 귀국한 영친왕 부부와 진 왕자(남대문역 지금의 서울역)

진왕자의 장례식 때 (옆에는 시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이은이 육군 장교로 근무하게 될 무렵, 항일 민족투쟁이 일본 본토에서 잇따라 발생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천황을 살해하기 위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고 무정부주의자 박열 등도 이와 비슷한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더욱 차별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이은과 이방자 내외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몸소 느껴야 했다.

 

일본 관동지역에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때 이런 눈총은 조선인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변질됐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식의 모함으로 인해 6천여 명 이상의 무고한 조선인들이 학살됐다.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인해 이은 내외의 주위로 경호가 따라붙었다. 이는 황족 일가인 둘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재일 조선인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은에 대한 감시의 목적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참전하게 되면서 군인 출신인 이은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은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데는 그가 황족이고 군인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보다 좀 더 복잡한 속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재일 조선동포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은의 전쟁참여 명령을 철회시키려는 아내에게 이은이 한 말이 전해진다.

내가 만일 망명이라도 하면 조선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소. 너희 왕도 도망갔으니 너희들도 잘 대우해줄 필요가 없다고 조선인들을 개돼지 같이 부릴 것이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에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이 찾아왔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사령부는 일본 내의 군국주의적 요소를 일소하고 490개 가문에 이르는 귀족집안의 신분상, 재산상의 특권을 박탈했다. 이은 부부는 재일 한국인으로 국적을 등록해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됐다. 이후 이들 부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해방 직후 이은의 귀국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그의 귀국을 싫어했다. 당시 영친왕은 어렸을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비운의 황태자로 전국민적인 동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은의 지원을 받으면 어느 단체든 굉장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이은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보다 확대될 것을 우려해 이은의 귀국을 대놓고 꺼려했다.

 

실망에 빠진 채 일본에서 지내던 그는 미국 MIT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들 이구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의 여권을 신청했지만 그것 역시 이승만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은부부는 국적을 일본으로 변경했다.

 

더 나아가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하는 대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급되도록 하였지만, 이승만은 영친왕 이은을 거기에도 제외시켰다. 오히려 히로히토가 특별히 어용금 10만 엔을 이은 부부에게 매달 주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이은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서 잠깐 영친왕 이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구황실재산처리법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심지어 도쿄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마저 (주일대표부 건물로 쓰기 위해) 국유라며 내놓으라고 우겼다. 뜻있는 일본 변호사 한 사람이 막대한 구황실 재산의 계승자인 영친왕에게 소송을 권했다.

"전하, 한국 정부에서 전하의 재산을 다 빼앗고 생계비도 드리지 않는 것은 법률 위반이므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꼭 이깁니다. 재판을 거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변호는 제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친왕은 잘라 말했다.

"선생의 호의는 고마우나 이것은 우리나라 내부의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온갖 만행을 자행한 이승만의 후안무치한 행동에도 영친왕은 나라를 생각한 것이다.

 

이방자여사,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와 며느리 줄리아.

이구는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멀록(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한국명은 이주아)1959 결혼한다.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가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이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1963년 귀국해 한동안 성공을 했으나 1973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에 이혼했다.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그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다.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집요한 귀국 방해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1958에서 1961에 미국 하와이에서 생활 하셨다.

 

4.19로 이승만 독재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그는 이은에게 입국을 권유했다. 영친왕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여 민주당의 불안한 입지를 확고히 다지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눈치챈 이은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고 박정희 정부가 드러섰다. 당시 이은은 또다시 쓰러졌다. 병세는 매우 심각해서 그는 보행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부는 귀국 시 생활비 지원을 약속하며 이은부부의 귀국을 권유했다. 1963 11 22. 이은부부와 아들 이구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했다. 반신불수의 몸이 된 이은은 귀국 하자마자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영친왕 이은은 7여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최소한 이승만 보다는 훌륭한 인격인 듯 ....



 

이방자는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해 1963,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 1967, 언어장애인 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 남편이 죽자 1971, 지적장애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에는 광명시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 금혼식에서 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구 부부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시누이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후, 1989 4 30, 향년 88세를 일기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 5 8, 각계 인사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영양왕, 이은)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의민황태자(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영결식

일본인으로 태어나셨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가신 이방자 여사. 極樂往生을 기원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영친왕과 이방자 황태자비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