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일

미국, 캄보디아 침공

산풀내음 2017. 3. 13. 20:36

19705 1,

미국, 캄보디아 침공

 

캄보디아는 1949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인정받아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지만, 왕제에 대항하는 국내 파벌 간의 다툼으로 인해 국내에는 불안정 요소를 안고 있었다. 시아누크는 극단적인 중립주의 정책을 폈다. 시아누크는 소련, 폴란드와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중국의 원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중립주의 정책에 불쾌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1965 2월에 미국이 북 베트남의 공습을 단행(베트남 전쟁)하면서, 시아누크 정부는 대미 단교를 단행해,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의 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캄보디아 내에 친미정권의 수립이 필요했다.

 

1970 3월 18의 아침, 시아누크 국왕이 모스크바베이징에 방문 도중, 하원이 갑자기 소집되어 국가원수로서의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주동자이던 장군(Lon Nol, 1913-1985)은 비상시 권력이 주어져 수상이 되어, 10월에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의 수립을 선언했다. 친미의 론놀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시아누크(), 론 놀(중간), 폴 포트()

 

쿠데타 몇 일 후, 시아누크 국왕이 베이징에서 론 놀에 저항을 호소하면서, 거기에 답하는 데모와 폭동이 나라의 도처에서 발생했다. 3월 29에는 약 40,000명의 농민이 시아누크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 행진을 벌였지만, 군대와 충돌해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론 놀은 다음 달인 4월 미군에 자국에의 침공을 허가해, 농촌 지역 곳곳에 공습을 실행하였다. 이것은 베트남 전쟁의 호치민 루트를 분쇄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수 십만 명의 농민이 희생이 되었고,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루주의 급격한 성장을 불러왔다.

 

당시 북베트남군은 캄보디아를 이용해 게릴라 전술을 펼쳤고, 캄보디아에 북베트남군의 수뇌부들이 모여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사령부가 캄보디아에 있다는 소문은 닉슨대통령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박사, 그 외 몇 명의 군 관계자들은 캄보디아에 있는 북베트남 세력을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닉슨 미 대통령이 1970 5 1일 미군의 캄보디아 진공을 명령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군 전투부대를 캄보디아 내에 있는 공산군 은신처를 공격하도록 캄보디아로 파견했다고 발표했다. (침공 날짜와 관련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이는 침공 자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닉슨대통령 때문일 것이다.)

 

전쟁광들인 닉슨()과 키신저()

Nixon authorizes invasion of Cambodia, April 28, 1970

 

결국 B-52폭격기들이 캄보디아에 폭탄을 투하 함으로서 캄보디아가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공습 이후에도 북베트남 사령부는 찾지 못했다. 공군의 타격이 별 소용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자 미군은 본격적으로 육군을 투입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마을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식량을 불태웠다. 론놀정부도 쿠데타 이후 불안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캄보디아인들이 가난한 이유가 베트남인에게 있다는 선동을 펼치며 일방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습은 1973 1월 파리평화회담 이후에 그치지만,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미군이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포탄의 양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싸울 때 사용된 16만 톤보다 훨씬 많은 54만 여 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닉슨대통령과 키신저 박사, 닉슨 행정부내의 강경파들은 이러한 폭격 사실을 자료를 소각하고 이중보고서를 사용하는 등 치밀한 노력 끝에 은폐하는데 성공했다.

 

최초의 공습작전인 조찬 작전이 실시된 뒤 일주일 후 뉴욕타임즈에 공습을 의심케 하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지만 대중들과 언론사, 심지어 다른 정부기관마저도 이에 주목하진 않았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이 기사에 닉슨, 키신저 등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고 기사의 출처를 조사하기 위해 불법으로 도청장치 등을 설치하며 훗날 벌어질 워터게이트 사건의 단초를 마련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불거지면서 미 의회는 4년 뒤인 1973년에 가서야 전쟁이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중립국인 캄보디아로 확전된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이 캄보디아로 전쟁판도를 넓히게 되면서 전쟁 이전 경작이 가능했던 논 가운데 80%가 불모지로 변했고, 3800만 톤에 달했던 쌀 생산량은 66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이 빈곤층으로 전락했지만 친미정권인 론놀정부의 요인들을 비롯해 캄보디아의 극소수의 상류층은 여전히 테니스를 치고, 나이트 클럽을 전전하고, 와인이 곁든 프랑스 요리를 즐기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군과 론 놀정부군에 대항한 세력은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였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북베트남과 소련, 중국의 지원을 받았고 결국 베트남전이 종식됨과 동시에 론 놀정부를 밀어내고 캄보디아 집권세력이 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캄보디아의 주인이 된 크메르 루주는 훗날 폴 포트라는 악명 높은 지도자와 킬링필드로 이어지게 됩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은 닉슨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공산화되었고, 킬링필드라는 대량학살의 단초가 되었다.

 

키신저는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전쟁을 두 개의 중립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시킬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베트남에서는 장기전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작전은 중립국인 두 나라를 선전 포고도 없이 폭격하면서 미국의 교전 수칙마저 위반했다. 고엽제를 비롯한 화학 무기도 사용되었다. 이때 미군 폭격에 희생된 민간인은 캄보디아에서 60만 명, 라오스에서 35 만명에 이르렀다. -《키신저 재판》

 

 

 

전쟁으로 얼룩진 캄보디아 현대사

 

1단계 (1953– 1960년 말)

1953년 독립한 뒤로부터 베트남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기 직전까지. 이 시기는 시아누크(Norodom Sianuk) 국왕이 중립 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기. 미국은 이미 1960년 말부터 캄보디아 동부 밀림지역을 통해 남베트남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공산군을 친다는 구실로 공습을 벌이고 했다.

 

2단계 (1970– 1975)

베트남 전쟁이 격화됨과 더불어 프놈펜에 군부 쿠테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 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루즈 군과의 내전을 벌인 시기. 그 무렵 미국은 B52기들로 대규모 공습을 거듭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희생되었지만 그리고 킹링필드의 원인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 미 행정부는 공습 자체를 부인해 왔다.

 

중국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즈의 지도자들은 북경에서 망명 중이던 시아누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시아누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크메르루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장이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  (Washington Post, 1973. 7. 18.)

 

3단계 (1975– 1978)

1975 4월 사이공 함락 2주 앞서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군에 함락된 뒤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살벌했던 기간. 이상적이 자치농경 공산주의를 건설하겠다며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폈던 폴 포트 정권아래서 170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처형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킬링 필드이 시기다.

 

The first mass graves being excavated after the fall of the Khmer Rouge.

 

4단계 (1979 -1991)

10만의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Heng Samrin)과 훈 센(Hun Sen) (두 명 모두 크메르루즈 지역사령관 출신)의 친베트남 정부군과 폴 포트 크메르루즈 군 사이에 전쟁을 벌인 기간.

 

 

5단계 (1991 - )

파리 평화협정 뒤 유엔평화유지군 1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ITAC)의 선거감독하에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서고 잇단 정치불안 속에 크메르루스 지역사령관 출신인 훈 센이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1997)한 이후의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