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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 이은 서거

산풀내음 2017. 3. 14. 20:27

19705 1,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 이은 서거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 1897. 10. 20. - 1970. 5. 1.) 1970 5 1일 서울에서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이름은 은()으로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순종 황제의 이복 동생이다. 1900년에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로 책립되었으나 그 해 12월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의 나이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다.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으나 국력이 이미 기울 대로 기울었으니 그 해 일본인들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당시 약혼자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강제로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했다. 보통 정략결혼인 경우 당사자들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어린시절 영친왕, 이또와 함께, 영친왕은 황태자에 책봉 되자마자 11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조선 황족도 일본 황족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일적인 고종을 압박하기 위한 인질이었다. 일본 왕실 내에 있는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한 영친왕은 육군 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 중위로 군 생활을 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구

 

자신의 아버지 고종은 물론 어머니 엄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 그나마 순종 사후에 이왕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도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제사는 지낼 수가 없었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종묘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생활 속에서 몇 십 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단 희망과 의지는 놓지 않았는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억양, 문법 모두 틀리지 않고 말이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혼잣말을 하며 한국어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평도 있다. 또한 제2 세계대전 종전 후에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은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아리랑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추적 결과 이 아리랑 영어 번역자가 바로 영친왕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으로도 괴로워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망한 나라 왕족 취급을 했고 조선에서는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게다가 같은 전주 이씨인 이승만은 그를 증오하다 못해 아예 귀국 자체를 못하게 막아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라며 아내에게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1955년에는 여동생인 덕혜옹주를 이혼시켰는데, 정신질환자인 덕혜옹주의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에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이혼 합의를 그와 아내인 이방자가 대신 진행했다고 한다.

 

1961에 아들 이구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들렀다 일본으로 귀환하던 중 뇌일혈이 재발, 이후 의사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1963이 되어서야 혼수상태인 채로 56년 만에 겨우 한국에 오게 된다. 당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하와이의 이승만 귀국은 불허한 대신 (이건 제2공화국도 마찬가지)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배 풀었는데 그런 사례 중 하나다.

 

고국에서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1960년대)

 

1년의 병상생활 끝에 퇴원한 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한남동 일반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3백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7년 후인 1970 5월 1 사망하였다. 향년 74. 만약 순종의 뒤를 이어 제위를 그대로 계승했다면 재위 44년째였을 것이다.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5월 9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영친왕의 유해를 모신 재궁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아버지와 형이 안장된 홍릉, 유릉 능역으로 운구되어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왕릉 최후의 능원에 묻혔고 이후 전주이씨 종약원에 의해 의민황태자로 추존되었다.

 

이방자와의 사이에서 아들 2명을 두었지만, 장남은 일찍 죽었고 차남인 이구는 결혼은 했지만 자식은 두지 못했다.

 


 1989 4월 30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미망인 이방자 여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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