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일

스리랑카 프레마다사 대통령 폭탄테러로 사망

산풀내음 2017. 3. 14. 20:42

19935 1,

스리랑카 프레마다사 대통령 폭탄테러로 사망

 

라나싱게 프레마다사(Ranasinghe Premadasa, 1924. 6. 23 -1993. 5. 1.) 스리랑카 대통령이 1993 5 1일 수도 콜롬보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이날 집권 통일국민당(UNP)을 이끌고 노동절 퍼레이드에 참여해 행진하던 중 폭탄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날 발생한 테러로 대통령의 개인경호원 등 3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60여명이 부상했다. 목격자들과 경찰은 폭탄을 몸에 부착한 자살 테러범이 대통령 일행에 접근하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마지막 날


 

대통령 피살사건으로 스리랑카 전역에 무기한 통금령이 선포됐고, 수도 콜롬보 일대에 군이 배치됐다. 68세인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10년 간 총리를 역임한 뒤 1988 12월 대통령에 당선, 1989년 대통령 취임 이후 끝없이 정치적 위협에 시달려왔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데다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과 천성적으로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지난 195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익계의 거물 인사와 싸워 패한 뒤 1977년 주니우스 자예와르데네 대통령 집권당시 실권이 없는 총리직을 맡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가난에 찌든 지방주민들을 위한 1백만 가구의 주택 건설과 빈민들을 위한 구호정책의 실시로 주로 지방과 하류층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쌓아왔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장관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 자신의 사전허락 없이는 해외 여행까지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했으며 장관의 임명을 임의대로 행하는 등 다소 독선적인 통치로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왔다.

 

콜롬보의 세인트조셉대학을 졸업하고 정계에 진출하여 1950년 콜롬보 시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9681970년 지방자치장관을 지내고, 1976년 통일국민당(UNP)의 부총재에 올랐으며, 1977년 지방자치장관 ·주택장관 ·건설장관을 역임하였다. 1977년 총선거에서 반다라나이케 정권이 무너지면서 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983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8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국방장관을 겸하였으며,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반군과 내전 중이던 1993 5 1일 콜롬보에서 자살 폭탄테러로 사망하였다.

 


1983년 총리 시절 내한 시, 김상협 국무총리가 환대하고 있는 중

 

그러나, 라나싱헤 프레마다사(Ranasinghe Premadasa)는 반군과 내전 중이던 1993 5 1일 자살 폭탄테러로 사망한 6년 후 다시환생해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9 1 18, 스리랑카 각종 신문은 전 대통령 프레마다사가 환생했다는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소문의 주인공은 스리랑카 중부 시골 마을 한쿠란케타에서 출생한 22개월 된 남자아이였다. 이 아이는 농가에 태어났으며 부모는 그에게위제바후(Wijebahu)’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위제바후는 자신을 늘프레마다사라고 자칭하며 또 스리랑카 동전에 새겨져 있는 프레마다사 대통령의 두상을 보고 늘 자신이라고 말했다.

 

위제바후는 또 프레마다사의 가족을 자기 가족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아이가 묘사한 대통령 부인과 자녀 상황은 놀랍게도 완전히 사실과 일치했다. 또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 사망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불교 의식을 행했다. 심지어 위제바후는 자신이 전생에바브라는 남자에게 살해됐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당시 프레마다사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은 힌두교 결사대원바브였다. 소문을 듣고 전생의 동료들이 위제바후를 찾아가자 아이는 동료들을 적지 않게 알아보았고 그들과 아주 익숙하게 소통했다. 또 대통령이 살해당한 콜롬보 지역으로 데리고 가자 위제바후는 매우 슬프게 울었다. 이 사건은 스리랑카인들에게 큰 파문이 일으켰고 윤회설을 더욱 깊이 믿는 계기가 됐다.

 


 환생의 증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