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4일

국내 최초로 동대문-흥화문 간 전차 개통

산풀내음 2017. 3. 17. 18:02

1899 5 4,

국내 최초로 동대문-흥화문 간 전차 개통

 

1899 5 4일 서울 장안이 온통 술렁였다. 이날 오후 3시 동대문과 흥화문 사이로 전기를 먹는 수레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전차가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정부의 고관귀족들이 멋을 한껏 부린 채 시승했고, 갑남을녀들이 홀린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철로 주변에는 군인 3백 명과 순경 250명이 행여 발생할 사고에 대비해 경계를 서는 풍경이 펼쳐졌다.

 

1899 5 4일 오후 3시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된 전차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동대문에 구름처럼 모인 당시 한성 백성들


1899년 최초의 전차

 

1895년 명성황후 사후,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량리 홍릉을 빈번하게 행차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림으로써 한번에 드는 경비가 10만원 안팎이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한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 보스트위 등이 고종에게 접근하여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고종도 여기에 동감하여 한미합동으로 전기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어 1898(광무 2) 2 19일 황실에서 40만원과 35만원을 두 차례에 나누어 출자하기로 하고, 칙명을 받은 대한제국 육군총장 이학균(李學均)과 콜브란 간에 전기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콜브란은 서울의 전차, 전등 및 전화 가설과 운영에 관한 특허권을 얻게 되자 우선 전차가설을 계획하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1898 2 17일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 25일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 궤도공사를 준공하였다. 또한 동대문 안에 발전소 부지(현 동대문종합쇼핑센터 자리)를 선정하고 75kw 직류 600V 1, 100마력의 증기발전시설을 병행하였으며, 차량 조립도 마쳐 1899 5 4일 성대한 전차 개통식을 가졌다.

 

참고로 도시교통수단으로 노면전차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81년 독일 베를린이었으며, 동양에서는 1894년 일본 경도(京都)에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1899, 부산에 1915, 평양에 1923년 각각 전차가 개통되었다.

 

장안 한복판으로 시속 8km로 들어온 전차는 대중교통의 혁명을 몰고 왔다. 갑오경장 이래 소개된 인력거나 자전거는 전차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40인승 두 칸으로 연결된 이 전차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 유리창을 달았고 내부는 방과 마루로 구성됐다.

 

전차는 개통 후 보름 동안 점검을 마친 뒤 520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오전 8시부터 오후6시까지 `땡땡`거리며 운행한 전차는 어느 골목에서나 승객이 손만 들면 태워주었다. 물론 청량리까지 엽전 닷 돈 등 구간에 따라 요금의 차등이 있었고 차장도 있었다. 경향각지에서 전차를 한번 타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 평균 승차인원이 2170(당시 서울인구는 약 2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보신각 앞을 지나는 서울 전차

 

하지만 개통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5 26일 첫 사고가 일어났다. 파고다 공원 앞을 지나던 전차가 다섯 살 난 아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낸 것이다. 그 해 봄 유난히 극심 했더 가뭄이 전차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을 무렵이었다. 흥분한 군중들은 사고 전차의 운정원을 끌어내려 몰매를 가했고 전차는 뒤엎어 불살라버렸다. 반대편에서 오던 전차까지 파괴한 군중들은 동대문의 발전소까지 몰려갔으나 콜브란이 직원들을 무장시키고 발전소 주변 철조망에 600V의 전류를 흘려 보내며 방어한 덕에 무사 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날 각 신문에 한성전기회사의 광고가 실렸다. 어제의 사고에 사과하고 시민에게 주의를 부탁하는 광고가 아니라단체 유람 특별열차운행 광고였다.

오전 8시 정각에서 오후 5시 정각까지. 한 차에 20인 이내면 지폐나 은화 12원이요, 20인 이상이면 1인당 60전씩 더 징수하되 시한이 지나면 1시간당 5원을 더 징수함. 특별열차를 타고 유람하려는 사람은 그 며칠 전까지 전기회사에 반드시 고지(告知)해야 함.”

 

하지만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인 운전원과 기관사가 귀국하는 바람에 한동안 전차운행은 중단되었다. 이후 전차 운행이 본격화 되며 노선도 늘어나 그 해 말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 다시 이듬해 1월 남대문에서 구 용산(원효로 4)까지 선로가 연장되었다.

 

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시절 전차는 큰 호황을 누렸고 1950, 60년대까지 대중교통수단으로 서울 시민들의 발이 되어왔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버스, 자동차 등과 경쟁하면서 적자가 누적되어 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차량이 노후화 되고 속도도 느려 오히려 버스나 자동차 운행에 방해가 되자 운행이 중단되었다.

 

1968 11 29, 전차개통 69 6개월 12일 만에 마지막 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1974년에는 서울에 지하와 지상의 전기철도가 등장하였고, 이어 부산에도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지하철’과 ‘전철’로 불린다. 1972년 태백선의 일부 구간에 산업용으로 등장한 전기기관차는 점차 널리 보급되고 있어서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전차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속철도 또한 전차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