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4일

시대의 사기범 장영자, 이철희 부부 구속

산풀내음 2017. 3. 17. 18:41

19825 4,

시대의 사기범 장영자, 이철희 부부 구속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82 5 4일 거액의 어음사기사건으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를 구속했다. 전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중앙정보부 차장 그리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거물 이철희(당시 59)와 그의 부인 장영자(당시 38)가 가진 힘과 배경만 믿고 돈거래를 했던 수많은 기업인에게는 가히재앙이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이철희, 장영자의 사기행각을 도운 혐의로 구속되어 구치소로 향하는 은행 및 기업 간부들

 

당시에는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절대 권력자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의 처제인 장영자와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국회의원 출신의 이철희, 이 두 사람의 신분과 이름이 사업 자본이고 기술이고 상품이었다.

 

 

장영자는 1981 2월부터 1982 4월까지 자기자본이 부실한 건설업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해 준다. 그 대가로 빌려 준 돈의 2배에서 최고 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 시장에서 할인(어음 만기일까지 갚아야 할 이자를 먼저 떼고, 어음을 현금으로 바꾸는 것)을 하거나 주식에 투자하는 수법으로 총 7,111억 원의 어음을 유통시켰다. 이 가운데 어음사기 행각을 벌인 액수만도 6,404억 원에 달했고, 어음들을 할인해 파는 수법으로 총 1,400 억 원을 챙겼다. 그들이 생활비로 쓴 돈은 한 달 평균 3 5천 만원, 1 1,089만원에 달했다. 평생 모아도 천 만원 모으기가 쉽지 않은 시절에 수천 만원을 단 하루 만에 쓰고, 친척에게 용돈이라며 수억씩 건넨 이들 부부의 사치와 씀씀이는 일반 국민들의 숫자감각마저 마비시켰다.

 

수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어음 환금이 시도되면서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 이름 있는 중견 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했고, 라이프주택, 삼익주택, 해태제과 등 이름만 대도 다 아는 기업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이들 기업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의 행장들이 구속되는 등 금융권 역시 크게 흔들렸다. 그 파장은 주식시장의 교란 및 대량 실직 등 일반 서민 경제에까지 미쳤다. 당시 94백 명의 소액주주가 전 재산을 들여 보유하고 있던 주식들이 모두 휴지 조각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생계 수단과 삶의 터전을 잃고 길바닥으로 나앉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시민들의 분노와 의혹은 대통령 영부인 등 권력의 핵심부로 향했고, 서둘러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검찰의 초기 축소 수사 의혹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연이어 법무부장관을 두 번이나 경질했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권정달 사무총장이 물러났으며,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를 비롯해 32명이 구속되었고, 그 중 11명이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장영자, 이철희 부부는 모두 사기 범죄의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씩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이철희는 1991, 장영자는 1992년에 형기를 각각 5, 6년 남기고 가석방되었다.

 

장영자, 이철희 부부는 출소한 지 2년 만인 1994, 다시 140억 원대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4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1998 8·15 광복절 특사로 풀려 나왔다. 이번에는 장영자에게 놀아난 서울은행장과 동화은행장 및 두 은행의 상무이사 3명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장영자, 이철희 부부의 사기 행각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이 도입한금융실명제의 그룹망에 걸린 것이다.

 

1994년 구속 당시

 

그 이후, 출소한 지 2년 만인 2000 5월에도 220억 원대의 이른바구권 화폐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구속됨으로써 세 번째로 복역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까지 범행에 끌어들였다. 1심에서 징역 10년 형을 받자 장영자는억울하다며 항소했고, 항소심을 담당한 서울고법 민일영 부장판사는 선고 전에 이례적으로장씨는 이미 사기죄로 실형을 살고도, 가석방이나 형 집행정지로 잠시 자유의 몸이 된 틈을 타 범죄를 저질렀다. 80평 호화 빌라에서 6~7명의 비서를 두고 캐딜락 등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사기를 일삼은 장씨에게, 죄를 짓지 않고 올바로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당부의 글을 읽어주었다.

장영자는 다시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를 제기했지만 2006 6월 대법원에서는 이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 부부에게처벌의 범죄 억제 효과는 딱 2년간만 작용하는 듯했다.

 

2000년 구속 당시

 

장영자는 숙명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재학 시절미모와 재능, 언변 등이 가장 뛰어난 학생 ‘5월의 여왕, 메이퀸에 선발된 재원이었다. 너무 일찍 유명해진 탓이었을까? 1966 1,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결혼한 장영자는 채 몇 년을 함께 살지 못하고 이혼한 뒤 1977년 돈 많은 사업가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파경에 이르렀다. 이 두 번의 이혼에서 얻은 5억 원의 위자료를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큰돈을 번 장영자는 사채 시장에 뛰어들어큰손이 된다.

 

장영자는 1981년에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아버지뻘인 이철희 전 중앙정보부 차장과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경력 10년의 교사 월급이 50만원이었는데, 두 사람의 결혼식에 1억 원이 들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사실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뛰어난 미모와 언변 덕에 사교계를 휘어잡던 장영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특별한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던 사람이었는데, 돌연문화재보호법위반으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중앙정보부 차장 이철희가 장영자를 도와줘 4개월 만에집행유예판결을 받고 풀려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야망과 욕심에 사로잡힌 미모의 젊은 이혼녀와 권력의 주변부로 물러나 앉은 늙은 남자 사이의로맨스가 시작된 것이다.

 

이철희의 장영자에 대한 애정을 각별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남편 이철희는 1991 6월 먼저 가석방되자 곧바로 장영자가 수감 중이던 청주교도소 근처에 방을 얻어 이듬해 3월 장씨가 가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 했다. 오랜 수감생활로 인한 긴 이별에도 강한 부부애를 과시, 화제가 됐다. 이 씨는 부인 장 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장영자가 수감되었을 당시 남편 이철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아내는 사회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매우 착하고 정이 많은 불쌍한 여인이라며이제 황혼에 들어선 우리 부부가 가정의 따뜻함을 알고 생을 마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2006년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딸 김 씨의 이혼, 첫 남편 김 씨의 투병, 게다가 사위인 탤런트 김주승의 사망까지 장 씨 일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02년 뺑소니 사건에 휘말렸던 장 씨의 아들 김 씨는 해외에서 얻은 질병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뺑소니 사고 이후 대만, 이탈리아, 중국 등을 전전하다 2004 8월 입국과 동시에 경찰에 체포된 김 씨는대뇌 수축증이라는 희귀 질병으로 보석 조치를 받아 석방됐다.

 

한편, 한 언론사는 10여 년 동안 숨겨져 있던 장 씨의 손자를 찾아 일가족으로 맞았다고 밝혔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 아이의 모친이 유명여자 연예인 A씨라는 점. 90년대 중반 A씨는 김 씨와 연인으로 지내며 아이를 낳았다. A씨는 김씨와 헤어져 아이를 홀로 키워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이가 2006년 극적으로 10여 년 만에 친아버지를 만나고 장영자 집안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1994년 장영자씨가 사기혐의로 다시 4년 형을 선고 받아 아들 김씨가 힘들어하는 과정에서도 A씨가 큰 힘이 되어 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둘은결혼까지 이르지 못했다. A씨의 한 측근은 “A씨가 장영자씨 일가의 일원이 되는 데 상당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장영자 아들 김씨의 사망설도 나돈다. 2007 8월 전 사위 김주승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장 씨가 그토록 아끼던 아들 김 씨도 2009 8월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사 기자는 진주교도소로 사실 확인 차 장씨에게 면회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진주 교도소 관계자는장영자씨의 속마음까지 알 수 없지만 비교적 침착하게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장씨의 남편 이철희씨는 현재 생존해 있으며 노환으로 귀가 잘 안들려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