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4일

육탄 10용사 사건

산풀내음 2017. 3. 17. 18:10

1949 5 4,

육탄 10용사 사건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전면전을 예고하는 소규모 전투가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일어났고, 특히 6.25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는 그 횟수가 잦았다. 1949 4월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은 인민군 1사단 제3연대 병력 1천여 명을 개성 송악산 후방에 집결시켰다가 5 3일 새벽 송악산 능선을 따라 기습 남침, 38선 남방 일대의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1949 5 4, 한국군은 빼앗긴 송악산 고지의 재탈환을 수십 차례 시도했으나 수적열세와 적의 토치카(tochka, 지하 참호)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공격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의 피해만 늘어갔다. 결국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송악산 능선에 버티고 있는 북한군의 토치카 10개소를 파괴하는 것만이 38선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들 용사를 모집했다.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과 직접 맞바꿔야 하는 작전이었으므로, 공격대원을 지정할 수가 없는 문제였기에 지원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이에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하는 9명의 군인들이 용감하게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박격포탄과 폭약을 안고 스스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하늘을 뒤덮는 폭음과 함께 적의 토치카는 박살났고, 한국군은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무사히 탈환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낮 12시경 중화기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가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류탄 7개를 몸에 지니고 돌진하다가,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한편 이 와중에 장병 3백여명이 표무원 소령의 거짓 정보에 의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 소령은 장병들에게 "적에게 포위됐다. 투항 만이 살길이다"며 월북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아홉명의 용사에 박하사를 포함한 열명의 용사를 '육탄 10용사'로 명명하고 이들의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기려, 서부덕 상사는 소위로, 다른 9명은 상사로 특진시키는 동시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고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지난 2001년에는 전투부대 중, 상급 모범 부사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육탄 10용사상'을 제정해 참모총장 상장과 기념패를 전달하며 이들의 희생정신을 추모하고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육탄 10용사 사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그 견해에 따르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 육탄 10 용사 중 단독으로 돌입해 자폭한 박창근 하사 외 9명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머지 9명도 폭연이 확인된 것은 4개이니 최소한 5명은 자폭에 실패했다. 이 군인들은 접근 중 전사했을 수 있으나 포로로 잡혔을 개연성도 있는 데다가 육탄 10 용사 중 특별공격대장인 서부덕 이등 상사와 오제룡 상등병이 '평양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이 군인들은 귀순해 잘산다는 것과 자신들의 교우·친척·인척 관계를 자세히 말했고 목소리도 실제와 비슷했다.

 

그리고, 휴전 후 10년이 지난 1964년에 채록된 당시 1사단 13연대장이었고 박정희 정권 때 고위직을 역임한 김익렬의 증언을 듣자면,

“송악산에서 격전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병소대장 박모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되자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 채 모조리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노발대발했다이때 박 소위와 친했던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이 거짓말을 한다. ‘사실은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보고를 들은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던 것이다.

 

파주시 통일공원 내 육탄 10용사 충용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