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4일

조명하 의사, 일본 육군 대장에게 독검을 찔러

산풀내음 2017. 3. 26. 22:19

1928 5 14,

조명하 의사, 일본 육군 대장에게 독검을 찔러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마지막까지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한 독립운동가의 유언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위 말은 1928 10 10일 오전, 조명하 의사가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이다.

 

1928 514일 오전 955분경, 무개차 한 대가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초(大正町) 도서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가 커브길을 도는 순간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차로 뛰어올랐다. 차 안에는 대만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가 타고 있었다. 청년이 독이 묻은 단검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으나 독검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기만 하고 운전사 손에 꽂히고 말았다. 다시 군인을 향해 독검을 던졌다. 역시 빗나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23살의 조명하(趙明河)였다.

 

조명하 의사는 1905 4 8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출생했다. 황해도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 노백린 선생 등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독립 운동에 뜻을 품게 되었다. 조명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610만세운동을 겪고 나서였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의사는 고향에서의 안정적인 직장과 처자식을 두고 일본으로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면서. 당시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조명하 의사는 전기회사, 상점, 공장 등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오사카상공전문학교 야간부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조국독립을 위한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조명하 의사는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상하이로 직행하면 신분이 노출되어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명하 의사는 타이완 찻집에서 일을 하며 힘든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그러던 중, 조명하 의사에게 일본의 당시 천황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육군 대장이 대만에 있는 군부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 소식을 들은 의사는 1928 5 14일 극약을 바른 단도를 가슴에 품은 채 구니노미야의 행렬이 이어 질 곳으로 향했다.

 

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고, 조명하는 황족위해죄로 그 해 1010일 이국땅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