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4일

학살의 씨앗, 이스라엘 건국

산풀내음 2017. 3. 26. 22:27

1948 5 14,

학살의 씨앗, 이스라엘 건국

 

1948 5 14일 오후 4,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65만 명의 유태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벤 구리온(David Ben-Gurion, 1886. 1. 16. – 1973. 12. 1.)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스라엘 건국`을 알린 벤 구리온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된 인물로 여전히 이스라엘인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한편 인종차별과 더불어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비판의 인물이기도 하다.

 

1948 5 14일 유태인 지도자 벤 구리온(단상 가운데 일어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건국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단상 뒷쪽의 초상화는 시오니즘의 선구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초상화.


독립선언문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과 아랍인은 원래 셈족계열로 비슷한 조상에 비슷한 신화랑 비슷한 종교를 가지고 사는 인종이었다. 실제로 남한보다도 작은 땅이지만, 교통의 요지로 이집트-이스라엘-시리아로 이어지는 땅으로 이전 셀 수 없이 많은 강자들이 이 땅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다른 인종들은 문화적 차이가 있었어도 대부분 다신교를 믿는 종족이라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유대인들은 일신교를 믿으면서 역사상의 강력한 제국에 동화되지 않고 앗시리아나 바빌론처럼 쓸어다가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나기도하고 페르시아의 관대한 키루스대제때는 다시 고향에서 살기도하고 셀레우코스 밑에서는 마카베오라는 지도자의 지휘하에 독립시기도 가져보고 비교적 관대한 로마 밑에서는 계속 반란도 일으키는 등의 많은 고난을 거쳤다.

 

그러나 로마는 자꾸 반란을 일으키는 유태인들을 완전히 정복해서 서기 73년에 마사다 요새의 항전을 끝으로 유대인을 철저히 탄압하고 전부 강제 이주를 시켜버렸다. 이후 뿔뿔이 흩어진 유태인들은 동시대에 같이 살던 라틴 게르만 슬라브랑 점차 동화되어서 살거나 아니면 거기서도 독하게 유태인임을 지키며 살았고, 또는 사막의 동방쪽으로 흩어져서 아랍인들과 부대끼며 살거나 심지어는 에티오피아나 중국, 일본, 한국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유럽쪽에 살던 유태인을 아슈케나짐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

 

당시 타 민족에 동화된 유대인들은 상관없지만, 독하게 유대인을 지키는 사람들은 현재 이슬람이 유럽에서 취급 받는 것과 비슷하게 엄청나게 박해를 받았다. 왜냐하면 유럽의 보편 종교인 카톨릭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태인들은 메시아인 예수를 거부하고 심지어 예수를 못박아 죽인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카톨릭 교도들은 심심하면 유태인을 구타하거나 죽이고 심지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둔 것처럼 따로 게토란 거주지에 두어서 섞여 살기조차 거부했다. 결국 농사도 못 짓게 하고, 같이 살기도 거부당한 유태인들에게 주어진 직업이라고는 돈이 돈을 낳는 고리대금업밖에 없었다. 유대인은 거의 1500년 정도 미움을 받으며 유럽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일의 시작은 1894년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소위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라는 것인데, 1800년대 후반 당시 독일이 통일을 이룩하면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크게 지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이었다. 결국 독일에 대한 악감정이 남은 상태서 독일에 포섭된 한 스파이가 보낸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자, 결국 이 드레퓌스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아프리카로 보내버리게 된다. 모든 증거가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이 사람이 모든 혐의를 뒤집어 쓴 이유는 드레퓌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레퓌스가 유대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프랑스 사람인데도 혈통만 유대인인 것 때문에 유죄를 받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거의 모든 유럽의 유대인들은 충격과 공포를 받게 되었고, 그 중에 한 사람이 크게 깨달음을 얻었으니 헝가리 출신의 테오도르 헤르츨이란 기자였다.

 

자유 평등 박애 인권을 앞세우고 혁명의 나라이자 모든 억압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프랑스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드레퓌스를 아프리카로 보내는 걸 보면서 헤르츨(Theodor Herzl, 1860. 5. 2. -1904. 7. 3.)은 깊은 좌절감을 느끼다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된다. "유럽을 떠나서 옛날 우리 선조 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라는 시오니즘(Zionism)을 옹호하게 되었고 사상 확대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이름인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헤르츨의 외침은 처음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드레퓌스와 비슷한 처지였던 동유럽쪽 유대인들에게서는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난 것과 같은 생각으로 받아들여졌다.

 

Theodor Herzl in Basel, 1897

 

헤르츨은 처음에는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 바로 돈 많은 유태인들의 투자이민을 적극 유치한 것이다. 당시 중동지방의 패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다. 물론 영국, 프랑스가 최강국으로 있고, 당시 주변의 이집트나 아라비아는 큰 힘을 갖지는 못한 상태이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유대인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결국 이스라엘 지방 쪽에 땅을 조금씩 사서 가족단위로 이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초기의 아랍인들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처음에는 하나 둘 이사를 오니, 불쌍해 보여 사이 좋게 지내고 도움도 많이 주고 가족처럼 지내는 아랍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세계 패권국 영국이 바로 오스만 투르크의 아라비아 지방과 거대한 중동지방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당시 대영제국은 막대한 식민지를 더 확장하고자 한 결과로 제1 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투르크는 그 거대한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한테 빼앗기게 된다. 문제는 영국이 터키계열 민족들에게 억압받던 아랍인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1915 '아랍에는 아랍인들을 위한 국가를 세워주겠다'라는 맥마흔 선언을 한다. 그리고 나서는 전쟁이 장기화되자, 돈 많은 미국계 유대인과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1917년에는 '중동에 유대인 국가를 세워주겠다'란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한다. 이에 고무된 유태인들은 밸푸어 선언 이후 9년간 10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히브리 대학교를 건설하고 땅을 매입하는 등 건국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이곳에 1800여 년 이상 터전을 잡고 살고 있던 아랍인들을 자극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외부장관 밸푸어가 선언한 내용 그런데 자기 땅인가???

 

1 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중동의 거대한 오스만 투르크 영토는 터키쪽만 겨우 건지고 나머지는 전부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 하였다. 프랑스쪽 식민지가 나중에 시리아과 레바논으로 독립해 떨어져 나갔고, 영국쪽 식민지는 이후 사우디와 요르단, 그리고 현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이 되었다.

 

여기서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무시하게 되는데, 막상 전쟁이 끝나고 나니 당장 수적으로도 훨씬 많은 아랍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대인쯤은 하고 무시하고 넘긴 것이다. 영국의 생각으로는 실제 돈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이 가진 미국이나 유럽의 기반과 재산을 모두 다 날리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영국은 이 지역에 엄청난 싸움의 불씨만 남기고, 중동의 석유와 각종 자원들을 독식한 것이다.

 

한편 당시의 시오니즘에 기반한 투자 이민은 그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인종 구성분포를 보면 아랍인 60만에 유대인 10만 정도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랍인들의 불안감은 증폭되었고,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영국의 비호를 받은 아랍인들이 유대인들 집단 폭행하고, 집을 불태워 버리고,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랍민족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도 시작되었다. 영국은 아랍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이번에는 유대인과 손잡게 되는데, 영국이 대준 무기로 무장한 유대인들은 강력한 무장단체인 아그니를 만들어 아랍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훗날 이슬라엘의 건국에는 아그니 출신의 군인들이 큰 활약을 펼치게 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똘똘 뭉쳐서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다녔지만 아랍인들은 영국과 유대인들의 진압에 지도자도 잃고 내부의 분열로 결국 1939년이 되면서 중동 쪽 패권은 거의 유대인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 유럽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된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 거대한 전쟁에서 줄타기를 감행한다. 유대인들은 영국에 협력하는 것을 택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은 독일의 롬멜이 북아프리카 지방으로 진격하자,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만 여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끌어 모아 군단을 만들어 이집트에 배치시켰다.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였으나, 영국도 당장 국가가 망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에, 빨리 중동에서 손떼고 나가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아랍인과 유태인들 간에 내전이 극심한 상태였고, 무장단체 단속에 항의하여 유태인 무장단체가 영국군이 사령부로 쓰고 있던 다윗 왕 호텔에 1946 7월에 폭탄 테러를 해 다수의 영국군 사령부 요원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더욱 더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설된 UN에 떠넘겼다.

 

그러다가 점차 나치 독일 밑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점차 유럽과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국제여론이 유대인들에게 동정적으로 돌아갔고, 수많은 시오니즘 추종자들은 이 흐름을 타고 이스라엘 건국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데, 이 지방을 잡고 있는 영국은 유대인에게 이 땅을 줄 생각은 없었다. 왜냐면 당시 독립한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은 유대인들을 배척하고 있는 상태이었고, 괜히 아랍국가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석유 수급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결국 영국은 10만에 달하는 군대를 새로 파견했고, 이번에는 다시 영국군이 방관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UN이 어떻게든 중재를 나서보려 했지만, 영국은 요지부동이었고, 강력한 영국함대를 동원해서 지중해를 막고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걸 중간에 막거나 심지어는 격침까지 시켜버릴 정도로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유대인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고, 특히 영국보다 강력한 미국이 유대인을 옹호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도를 지나친 학살 사건도 발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8 4월 9일 발발한 데이르 야신 학살 사건(Deir Yassin Massacre)이다. 예루살렘 근교의 팔레스타인 마을 데이르 야신에 유태인 무장 단체가 침입해 노인, 여성, 어린 아이를 포함한 주민 254명 전원을 살해했다. 이는 아랍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주어 팔레스타인에서 내쫓기 위한 유태인들의 고의적인 학살 행위였다.

 


아버지의 눈물, 유대인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것도 용서가 되지 않는데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도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해리스 트루먼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유대인들은 각종 로비와 여론몰이 선동에 나섰고, 점차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1947 UN이 나서서 결의안을 만들어 낸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에게 각각의 나라를 세워주고 워낙 분쟁이 심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UN이 관리하겠다 라고 나선 것이다.

 

유엔의 결정에 유대인들은 적극적인 환영의 뜻을 표시한다. 물론 남쪽에 커다란 지방은 대부분 사막이었지만, 드디어 국제공인을 받은 유대인 국가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러한 UN결의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의견에 상관없이 1948 5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영국군이 완전 철군하는 날이었던 1948 5 14일 텔아비브 미술관(현 이스라엘 독립기념관)에서 유태인 지도자 벤 구리온은 "에레츠 이스라엘은 유태인의 탄생지였다"로 시작되는 건국 선언을 낭독했다. 5 14일은 이스라엘의 '건국 기념일'인 데 아랍인들은 이 날을 '재앙의 날'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유태민족에게는 비원의 성취였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유태인 테러단체의 폭력을 피해 원주민의 70%에 해당하는 72만 명이 돌아올 기약도 없이 서둘러 살던 곳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건국 선언 직후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의 아랍 5개국은 이스라엘에 선전포고했다. 아랍의 15만 침공군에 대항하여 3만 명의 이스라엘군은 예루살렘 신시가와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도시 게릴라 전술로 맞섰다. 1차 중동전쟁의 개전으로, 이스라엘에서는 '독립 전쟁'이라 부른다.

 

민간인 피해가 막대해지자 유엔은 휴전을 호소했다. 휴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체코 폭격기나 미국의 셔먼 전차, 영국의 크롬웰 전차 등을 밀수해 반격을 준비했다. 반면 휴전 기간 동안 아랍 제국은 이견 조정에 실패하며 오히려 분열상을 노출했다. 7월부터 재개된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승승장구하며 영토를 넓혔다. 1949 2월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정전한 것을 시작으로 7월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정전함으로써 제1차 중동전쟁은 끝이 났지만 팔레스타인 분쟁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종국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1차 중동전쟁 중 남부 전선을 시찰중인 벤 구리온.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여전히 칭송 받지만, 이스라엘 출신 아랍인과 세파르딤을 차별했던 것으로 비판을 받는다. 가령 이스라엘 아랍인들을 가리켜 '5'이라 불렀다든지, "모로코리비아, 예멘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다. 나는 아랍 문화를 싫어한다. 그들도 탐탁치 않다"고 말하는 등 공공연히 차별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벤 구리온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지시하였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벤 구리온이 인종 청소를 지시했다는 심증은 있고 실제로 아랍인들은 그렇게 보지만, 정작 물증이 없는 상황. 하지만 당시 그의 비서였던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자신들 스스로가 인종 청소의 피해자이면서도 스스로 가해자가 된 유태인들…그들이 나치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진심으로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