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4일

한글판 조선왕조실록 발견

산풀내음 2017. 3. 27. 20:31

1998 5 14,

한글판 조선왕조실록 발견

 

한글로 된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제작연도는 구한말 때인 1908년경, 대한제국 황실이왕조 정사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국어학자료팀 이광호 박사는 1998 5 14일 조선조 시대 최고의 사료인조선왕조실록’ (국보 151) 중 현종(18)에서 철종(25)에 이르는 기사를 발췌해 한글로 번역한실록초본을 서고에서 발굴, 공개했다.

 

한글판 조선왕조실록

 

이번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은 가로 23.4cm 세로 34.4cm, 137장 규모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명주실로 제책한실록초본 1908년 국왕을 위해 편찬된 왕실역사서국조보감과 짝을 이뤄 왕실 내 여성과 아동을 위해 만든 한글판국조보감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글씨는 남성의 필체로 짐작되는 단정한 해서체다. 내용은 인명만 한자이고 나머지는 순한글이며 왕의 등극 사망 왕세자책봉 종묘사직제사 정치사건 등 국왕의 재위 당시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서술하는 형식으로 돼있다.

 

이 박사팀은 "실록이 국가의 중요 문서인데다 실록청에 의해 공식 작성된 것으로 보여 당시 왕실에서 영향력이 컸던 여성, 특히 순종과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순명효황후 민씨나 영친왕의 모친인 엄비에게 왕가의 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왕실의 역사를 교육시키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성황후 이후 왕실 내에서 높아진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서울대 국사학과 최승희 교수는 "이미 실록과 그 완역판이 나와있는 시점에서 초록 발견은 사료적 가치는 별로 없지만 최초의 한글번역 시도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는 크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조(1392)부터 철종(1863)까지 25대에 걸친 472년간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별칭은 《조선실록》이다.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도 있지만, 일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실록이고 기존의 실록과 편찬 방식의 차이점이 있으며 심각한 역사 왜곡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실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1997 10월 1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남한에서조선왕조실록 1968년부터 1993년까지 26년에 걸쳐 민간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국역완간됐으며, 북한에서는 1972년부터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실 주도로 시작돼 1991년 완간됐다. 남한판 실록은 주석과 색인이 충실한 반면 번역이 연구용이라는 지적을 받은 데 비해 북한판 실록은 순한글로 번역해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번역했지만 학술적 이용에는 문제가 많다는 평을 듣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궁중 여성의 한글 사용

 

【시녀들 가운데 수강궁(壽康宮)에 머무르는 자가 있었는데, 한 시녀가 언문으로 아지(阿之) (궁내의 유모)의 안부를 써서 혜빈(惠嬪)에게 보내니, 혜빈이 내전에 상달하였다.

언문 글을 승정원에 내렸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묘단(卯丹)이 말하기를, ‘방자(房子)인 자금(者今), 중비(重非), 가지(加知) 등이 별감(別監)과 사통하고자 한다.’ 합니다.

하니, 즉시 조정에서 의논하게 하였다.

 

위 기록은 단종 1(1453) 4 2일자에 나타난 기록으로 궁중의 비번이나 궁녀들이 한글로 글을 지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1453년이라면 훈민정음 반포 후 7년밖에 안 되었던 시기이다. 빈궁 신분의 혜빈뿐 아니라 그를 돌보는 묘단 등의 시녀들도 한글로 글을 쓸 수 있었음이 위 기사에서 확인된다. 한글을 익힌 궁녀가 궁을 출입하는 남자를 좋아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몰래 통하려다가 발각된 사건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궁중 내에서 벌어진 여성들간의 암투와 갈등 과정에서도 한글 편지가 사용되었고, 심지어는 궁내에서 발생한 궁녀간의 동성애 사건을 궁중 유모가 발견하고 이를 한글 편지로 고해 바친 일도 있었다. 연산군 대에 언문 금압이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궁녀의 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의녀로 하여금 읽도록 하는 등, 실생활의 필요에 의해 언문 사용은 계속되었다.

 

특이한 것은 중종 때 신하들이 내전의 일을 기록하기 위해 여성 사관을 두자는 제안도 하였다는 것이다. 임금의 공무 수행은 평소에는 사관이 곁에서 일일이 기록하지만 규문 안에서 행해지는 임금의 일상은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 여자 사관[女史]을 두어 내전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자고 신하들이 중종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신하들의 이런 요청에 대해 중종은 처음에 한문을 잘 구사하는 여자를 찾기 어렵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여자 사관은 남자 사관과 달리 언문으로 기록해도 무방하다고 신하들이 다시 수정 제안을 내었다. 임금이 달가워할 리가 없는 안방 생활의 기록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한글 사용의 주체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신분은 대비(大妃)나 중전(中殿)이다. 특히 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경우 대비가 일정 기간 동안 수렴청정을 하는 관례가 있었던 바, 이런 시기에 대비가 언문서를 통해 국정에 참여한 기록이 많다.

 

특히 성종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가 언문을 통해 국정에 관여한 기사가 많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비시키는 과정에서 인수대비가 언문 문서를 통해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한 기사가 5건이나 된다. 대비와 중전이 내린 언문 교서의 내용은 왕의 신변과 건강 문제에 대한 것도 있으나, 국가적 정무에 대한 처결을 지시한 것도 상당히 많다. 언문 교서를 통해 중전 혹은 대비가 국사에 관여하고 중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와 순조 대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정순대비의 경우는 언문 교서를 통해 국정의 여러 방면에 깊이 관여하여 결정권을 행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