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6일

5.16 군사쿠데타(정변)

산풀내음 2017. 3. 29. 21:38

1961 5 16,

5.16 군사쿠데타(정변)

 

516 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문제와 군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ㆍ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군 내부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이 일어났다.

 

5.16 군사정변 주체들

1961 5월 18 육사 생도의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지켜보는 5.16 군사정변의 주도 세력. 좌측부터 박정희, 박종규, 이낙선, 차지철

 

4·19혁명을 계기로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붕괴되고 대체 지배세력 내의 온건파인 민주당이 7·29총선을 통해 집권하며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당시 민주당은 신·구 양파로 분열되어 원색적인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구조 속에서도 국민의 정치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이른바 '보수' '혁신'이라는 대립구조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국민은 법적·제도적 수준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정치적·경제적·이념적 수준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자립적 민족경제와 평화적 남북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민족자주화운동과 통일촉진운동을 활발히 전개해나가고 있었다. 이처럼 성급하게 고양된 국민의 정치의식은 곧바로 반공분단국가의 기저(基底)를 흔드는 것이었다. 특히 그것은 남한을 보다 강력한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고, 한국·미국·일본 간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던 미국의 이해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과 6·25전쟁을 치르면서 급팽창한 군부는 반공 분단국가의 보루(堡壘)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 도중 한국군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1950 10만의 규모였던 것이, 비록 1958년 이후에는 60만 규모로 유지되었지만, 1956년에는 70만으로 규모가 늘어났다. 당시 군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와 훈련지도를 받음으로써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근대화되고 서구화된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양적 및 질적 성장은 군 내부 세력들에게 진정한 국가발전을 담당할 수 있는 세력은 자신들 밖에 없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군의 현실은 가혹하였다. 전쟁 이후 피폐해진 경제로 장성들 조차도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박봉이었다. 그래서 많은 장교들이 부내 내에서 점심을 굶고 식권을 쌀로 교환해 식구들을 먹여 살릴 정도였다. 게다가 군부는 창설과정부터 파벌간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고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군부의 파벌성과 정치 지향성은 일부 영관급 장교들로 하여금 고위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빌미로 이른바 '하극상'사건을 일으키게 했다. 이는 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부의 쿠데타 시도는 이미 6·25전쟁 기간 중 이종찬을 중심으로 한 반()이승만 세력에 의해 모의되기도 했는데, 당시는 미국의 간섭과 주도세력의 분열로 불발되고 말았다.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가장 두드러졌고,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하면서부터 이미 군사정변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는 1960 5 8일 한 차례 쿠데타를 계획하였지만 4.19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 후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을 비롯한 지지세력을 규합하게 된다. 그들은 일사천리로 정변을 준비했다. 작전명은 비둘기로 하고 3 6일부터 11일까지 작전계획에 따라 사전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61 5 16일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의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 정도에 불과한 쿠데타 세력은 한강을 건너 수도의 주요기관들을 점령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방송국을 점령,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위원회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하고, 이날 새벽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그 뒤 32년 간에 걸쳐 군인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서울을 장악한 군인들

 

당시의 군사혁명위원회는 '혁명'에 필요한 조치로 금융동결, 항구와 공항의 폐쇄, 정권의 인수, 의회의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하고,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반공을 국시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 등이었다.

 

이 군부 정권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을 앉히고 박정희는 부의장으로 머물렀다. 3일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7 3일에는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44명의 군인들이 반혁명의 죄목으로 제거되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3년 간의 군정통치가 시작됐다.

 

장도영과 박정희

대한상이용사회의 5.16군사정변 지지 행렬

 

이 쿠데타 과정에서 이들은 미8군사령관 C. B. 매그루더와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미국 정부의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그리고 대통령 윤보선의 군사정변 인정 등으로 정변의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장면 국무총리 사임 기자회견

 

쿠데타 세력의 군정통치는 미봉적 개혁조치와 강압적 통치방식을 병행해 나갔다.

 

혁명공약이 담겨 있는 특집화보

 

첫째, 이들은 이른바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조치와 자립경제를 표방했다. 이들은 당면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해결방안으로 농어촌고리채정리, 부정축재처리, 경제긴급시책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국가건설계획으로 공업화를 통한 자립경제의 추구를 밝혔다. 또한 유진오를 중심으로 '국가재건운동본부'를 조직하여 국민의식을 개혁하고 국민의 지지를 동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근본적인 구조나 정책의 변혁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오히려 많은 문제점과 병폐를 낳았다. 사실 이 시기에는 개혁이란 미명하에 엄청난 규모의 부정도 저질러졌다. 그것은 부정축재처리 결과와 4대 의혹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961 6 6,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 7 7일 예술인 200여 명이 서울 국도극장 앞길에서 국가재건국민운동 참여 결단식을 열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을 향해 변형두 단장이 결의문을 읽고 있다.

 

둘째, 이들은 정당, 사회단체, 언론, 노동조합 등을 정리, 해체하고,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특히 '특수범죄(반혁명·반국가 행위)처벌법'을 제정하여 2,000여 명을 용공분자라는 혐의로 '혁명재판'에 회부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여 3,000여 명에 대해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군부 내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정기간 내 적발된 반혁명사건이 13건에 달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 시 32명이었던 최고회의 장성들이 대부분 제거되어 겨우 6명만이 남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1961 6 21일 개설한 혁명재판소는 290일간에 걸쳐 1천여회의 공판을 열어, 3.15부정선거 사건, 부정축재사건, 정치깡패 사건 등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데에도 .


셋째, 쿠데타 세력은 군사정권에서 국가기구의 강화와 정치구조의 재편을 통하여 권력기반을 구축했다. 이들은 핵심적인 권력기구로서중앙정보부'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관료조직을 장악해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권력을 제도화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근간으로 관료, 지식인, ()민간정치인 등을 흡수하여 '민주공화당'을 민정 이양 이전에 조직해 나갔다. 이와 함께 이들은 새로이 구성될 민간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대통령제로의 복귀와 기본권의 제한, 그리고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개정했다. 이들은 군정을 4년 연장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가 내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결국 '군복귀' 공약을 무산시키고 선거에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5·16군사정변은 1963 10, 11월의 양대 선거의 승리를 통해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