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6일

중국,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산풀내음 2017. 4. 1. 15:32

1966 5 16,

중국,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 1966 5월부터 1976 10월까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주도한 극좌 사회주의 운동으로,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대중 운동을 통해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권력 재탈환을 기도한 일종의 권력 투쟁이다.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계급 문화대혁명'이며, 약칭 '문혁'이라 한다.

 

 

중국은 1960년대에 들어 자급자족 공산 사회를 위해 경제 발전과 농업의 집단화 등을 시도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소련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사임하고,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등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이들은 수정주의 노선의 정책을 추진했으며,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어느 정도 복구하고 경제 발전을 우선시했다. 특히 류사오치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면서 인민 및 당원들은 그를 신망했다.

 

좌로부터 류사오치,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그러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이들의 정책이 자본주의를 부활시킨다고 주장했다. 점차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 세력이 그들을 수정주의와 자본주의를 따르는 주자파로 몰아 비판하면서 이내 사상과 정치 투쟁이 벌어졌고, 이는 문화대혁명 발발을 예고했다.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59년 말 우한()이 발표한 역사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이었다. 이 극은 청백리인 해서가 타락한 황제에게 파면된다는 내용이다. 1965 11,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의 지도하에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상하이의 〈문회보(文匯報)〉에 이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희곡이 마오쩌둥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실권파의 권력 기반인 베이징시 당위원회와 베이징의 지도적 지식인들, 이른바 삼가촌(三家村) 그룹은 마오쩌둥 추종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66 4, 우한을 지지한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이 해임되고, 국방부 장관인 린뱌오(林彪)가 합세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6 5 4일부터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북경확대회의에서 모택동 주석의 승인을 받은 `516 통지(通知)`를 발표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게 됐다. 이 통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깃발 아래 학술, 교육, 보도, 문화, 예술, 출판계의 브루조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 지도권을 탈취하며 당과 정부, 군대내의 브루조아계급 대표자를 비판해 일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아가 8 8,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 (階級文化大革命16)〉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의 목표는 중앙에서부터 지방 말단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게 존재한 류사오치, 덩샤오핑 파의 영향을 제거하고, 4(), 즉 낡은 사상, 문화, 풍속, 관습 등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이 이용한 것은 당 외의 대중, 특히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이었다. 이에 1966 5, 칭화(, 청화) 대학에서 최초의 홍위병이 조직되었다.

 




 

홍위병은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고대 사찰과 사당, 역사 유물들을 파괴했다. 홍위병의 세력이 커지면서 조직은 점차 분화되어 자신과 다른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는 타 조직을 비판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을 투입하여 무력 충돌과 폭력 사태를 저지하고 군대에 의한 통치를 시작했다.

 

1968 10월에 열린 제8차 중앙위원회 제12차 전체회의에서 린뱌오가 서열 2위인 당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린뱌오는 몇 차례 마오쩌둥 암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1971년에 가족과 함께 소련행 비행기를 탔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건의로 덩샤오핑이 다시 부총리에 올라 중앙으로 진출했다.

 

린뱌오(林彪, 1907-1971)

 

사실 린뱌오(林彪, 1907-1971)는 이보다 앞서 황푸군관학교 동기인 러우이칭(羅瑞卿, 1906-1978)을 제거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군사전략 관점에서 이견을 보여 소원해졌다.

 

뤄루이칭은 전쟁에 대비한 군의 대규모훈련을 강화하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현대전과 정규군화 노선의 적극적 방위 전략을 추구했다.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의 전통적 전략전술인 유격전을 기반으로 한 인민전쟁의 공격적 포위전략을 우선시했다. 린뱌오는 대규모의 군사훈련보다 정치와 사상공작을 더욱 강조했다.

 

린뱌오는 1964 11 30일 전군 조직공작 회의에서 또 다시정치우선정책을 제기해 정치사상 공작강화를 지시했다. 대규모 군사훈련 때 린뱌오는 뤄루이칭이 말을 듣지 않아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다.

 

당시 린뱌오는 건강이 좋지 않아 중앙은 허룽(賀龍 하룡)이 군사위원회 공작을 주재하도록 했다. 군사위원회 비서장인 뤄루이칭은 자연히 허룽과의 접촉이 잦아졌다. 뤄루이칭은 종전에 허룽과 일해본 적은 없었으나 이때 서로 마음이 맞아 가깝게 지냈다. 린뱌오는 뤄루이칭과 허룽의 관계를 의심해 뤄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정변 政變)으로 의혹을 키웠다.

 

반면 뤄루이칭은 린뱌오가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거리감을 두었다. 뤄루이칭은 원리원칙을 너무 따져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옌안(延安 연안)시절 마오는 뤄루이칭에게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라는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글귀를 준적이 있을 정도였다.

 

뤄루이칭은 마오의 기대에 부응해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범죄조직을 소탕하고 베이징의 치안질서를 바로잡았다. 마오의 뤄루이칭에 대한 신임은 높았지만, 개인숭배로 마오를 떠받드는 린뱌오에게는 족탈불급이었다.

 

뤄루이칭은 결국 린뱌오의 덫에 걸려 군권을 탈취하려는 반당, 반혁명분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1966 3월부터 뤄루이칭에 대한 비판공세는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 뤄루이칭은 3 18일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3층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다리만 부러졌다. 뤄루이칭의 자살미수사건은 당에게 책임을 전가하려했다는 이유로 고강도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뤄루이칭이 문화혁명 당시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어 광장에서 끌려 나가는 모습,

 

그러나 린뱌오의 죽음과 마오쩌둥의 건강 악화로 정부와 공산당 내에서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과 정치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정치적으로 친밀한 왕훙원 등 사인방의 권력이 커졌다. 1969년 이후 사인방은 미디어와 선전망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집행하는 경제 정책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1976 1,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의 주역이자 총리인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국무원총리에 화궈펑(華國鋒)을 임명했다. 1976 9 9일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과 인민해방군의 지지 아래 화궈펑은 사인방 전원을 체포했으며,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인방은 1980~1981년에 걸쳐 문화대혁명 당시 정책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장칭과 장춘차오는 교수형, 왕훙원은 무기징역, 야오원위안은 20년 징역을 선고 받았다.

 

흑방의 단원. 1966 912일 어린 홍위병이 중국 북쪽 끝에 있는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항일 전쟁 당시 홍군의 고위 간부였고 오랜 동안 헤이룽장성을 다스린 리판우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나라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홍위병 집회에 소환 당했다. 리의 목에 걸린 간판이 그를 흑방의 단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흑방은 마오쩌둥이 새로이 선포한 문화대혁명을 방해하려 한다고 고발당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홍위병 경험에 대한 자전적인 회고록에서 류솔라는 열한 살 때 학교에서 홍위병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걸했는지 회상하고 있다. 엄청나게 지독한 말로 가족을 공개 비난하고, 한때 지주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늙은 넝마주이를 감시하는 일을 도운 뒤에야 가입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그 늙은 여인은 류솔라가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목을 베어 자살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러한 비극은 비일비재했다.




낡은 봉건질서의 요소와 반동분자 색출이 1966년 널리 횡행했다. 홍위병이 산둥 성 취푸의 언덕에 2000년 넘게 후손들이 보존해 온 공자의 사당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 홍위병이 본전 입구의 정교하게 조각한 대리석 기둥을 커다란 해머로 부수고 있다. 왼쪽 위에는 인민에게 공자와 그 일당을 공격하라고 촉구하는 구호가 보인다. 이 구절은 1919 5.4운동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중국과 티베트의 사당과 사찰이 여럿 파괴된 것은 심미적인 측면에서 문화대혁명이 낳은 비극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