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0일

동티모르 독립 선포

산풀내음 2017. 4. 7. 21:49

2002 5 20,

동티모르 독립 선포

 

동티모르(East Timor) 2002 5 20 0(한국과 동일 표준시) 수도 딜리 인근 타시톨로 광장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 전세계 80여 개국 지도자와 주민 20여 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을 선포, 신생국으로 탄생했다. 아난 총장은 이에 앞서 19일 밤 1150분쯤 동티모르의 모든 통치권을 신생 정부에 공식 이양, 유엔기가 내려지고 동티모르 국기가 게양됐다.

 


 

유엔은 1999년 동티모르 독립투표 가결에 반발한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가 유혈폭동을 일으킨 후 과도행정기구(UNTAET)를 통해 동티모르 건국 준비 작업을 주도해왔다. 4 14일 대선에서 승리한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대통령 당선자는 국회의장 앞에서 취임 선서문을 낭독, 1524년 포르투갈 식민지 편입 후 약 500년 동안의 외세 점령과 동족상잔의 비극적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티모르의 독립영웅 사나나 구스마오의 초대 대통령 당선, 구스마오는 동티모르가 2002년 국민투표로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후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7년 임기를 마친 뒤 총리에 취임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PKF) 소속 군병력 5000여명과 경찰 1250명을 주둔시켜 동티모르의 국경 수비와 치안유지가 정착되도록 도와주었다. 앞서 미국 등 27개국과 15개 국제기구 대표들은 5 14일 딜리에서 회담을 갖고, 동티모르 해저원유·가스가 본격 생산되는 2005년까지 44000만 달러를 지원키로 합의했다.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위치한 동티모르의 면적은 남한의 6분의 1이며, 인구는 약 84만명. 언어는 공용어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포함해 15개이며, 주민은 말라이인과 파푸아인 등 36개 종족으로 구성돼 있다. 주민 대다수(91.4%)가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2001 8월부터 미국 달러화를 공식 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인류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티모르 섬에는 4-2만 년 전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3000 년 전에 멜라네시아 인들이 들어와 주로 산악지역에 살기 시작하였고, 기원 전 2.500년경에 말레이 부족이 남지나해 지역을 통해 흘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15년경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현재의 오애구시(Oecussi) (현재 인도네시아 영토인 서 티모르 내에 위치한 동티모르의 별도의 행정 구역) 해안에 최초로 상륙하여 주로 이 섬의 특산물인 백단향(白檀香: Sandalwood)을 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이 섬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524년 포르투갈은 티모르 섬 전체를 식민지로 편입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백단향을 실어내기 시작했다.

 

백단향은 가구와 악기, 각종 장식품을 만드는 목재로 사용됐다. 특히 짙은 향기가 나는 뿌리 부분은 향료 조각 세공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백단향은 성질이 따뜻해 가슴앓이, 배앓이, 곽란 등을 다스리는 약재로서 효능이 있다.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화시키면서 포르투갈과 티모르 섬을 놓고 각축이 시작되었다.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이던 1800 년대 후반에 들어 네델란드의 진출에 밀린 포르투갈은 1849년과 1860년 및 1893년 합의를 거쳐 동과 서로 분할하고 서쪽을 네델란드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서티모르는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종료되면서 전쟁 전의 상태인 네델란드 땅으로 복귀했다가 1949년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하면서 인도네시아 영토가 되었다.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온 동티모르는 1975년 포르투갈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자 제각기 정당을 형성하여 정부 주도권 쟁탈전에 돌입했다. 인도네시아와 합병을 주장한 티모르대중민주협회(APODETI)와 포르투갈과 연방을 결성하되 가까운 장래에 독립을 주장한 티모르민주동맹(UDT),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가톨릭계 엘리트 집단인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 3개 세력이 독립의 방법과 시기 및 내용 등을 둘러싸고 내전을 벌였다. 짧지만 격렬한 내전에서 승리한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은 1975 1128일 동티모르인민민주공화국(Republica democratica de Timor-Leste) 성립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묵인 하에 동티모르가 독립을 선언한지 10일째 되는 날인 1975 12 7일 동티모르를 침공하여 저항하는 주민 6만 여 명을 학살하였고, 1976 7 17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시켰다.

 

1975년도는 월남이 공산화되는 때로 동남아의 캄보디아가 완전한 공산국가 건설을 위해 지식인 자본가 등을 포함하여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250 만 명을 학살한 소위 Killing Field가 발생하였고, 태국, 필리핀도 공산반군에 의한 폭력저항이 계속되자, 미국과 호주가 태평양 일대에 중국의 세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었다. 이때에 친 중국인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의 정부수립은 태평양의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미국의 묵인 하에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불러왔다고 판단된다.

 

Indonesian officials, 7 of Dec 1975

독립 전 인도네시아인들에 의한 만행

동티모르 저항 단체

 

이후 세계적인 무관심 속에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와 군정(軍政)이 이어져,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통치 때 70만 인구 중 무려 20(!)이 추방되거나 학살되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 냉전이 종식되면서 겨우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아,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하면서 인도네시아가 IMF 크리로 휘청거리는 틈을 타 독립 열망이 고조되어 각국의 승인을 받고 주민투표를 거쳐 2002년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에 반대하는 서티모르 출신의 친() 인도네시아민병대의 반란과 권력 분쟁으로 인한 2006년 쿠데타가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던 군인들이 해고당하여 무직 상태가 되자 벌인 쿠데타로 결국 진압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호세 라무스 오르타(José Ramos-Horta)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같은 테러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