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7일

봉오동 전투

산풀내음 2017. 5. 2. 23:50

1920 6 7,

봉오동 전투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내에 비밀행정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세금을 걷어 행정력과 무장력을 뒷받침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곧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때문에 독립군 장병들은 무기와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전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1920 6 4일 화룡현 길림성에서 벌어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는 사실 전투라기보다는 소규모 교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싸움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둔자전투는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투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고 귀환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군이 1개 중대 병력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1920 64,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 3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국경초소를 급습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가 이들의 뒤를 쫓았으나 독립군은 이미 근거지인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에 몸을 숨기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 6일 오전 10, 매복해 있던 독립군의 일제사격으로 60여명이나 사살됐다.

 

삼둔자전투에 출전했던 아리요시 중대가 패배하고 돌아오자 일본군 제19사단장 다카시마 중장은 야스카와 소좌 휘하 1개 대대 병력을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로 편성해서 증원군으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에 홍범도 부대의 뿌리를 뽑기로 작정하고 그들의 본거지를 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에 야스카와 대대는 약 3백명의 병력을 동원해 봉오동으로 출동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홍범도는 그들이 국경지대의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갈 지()’ 형태의 복잡한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봉오동(鳳梧洞)의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작전을 준비했다. 봉오동에 있는 계곡의 끝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개활지가 있었다. 비록 이 장소는 폭이 100미터 남짓한 좁은 지역이었으나 적군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전멸시킬 수도 있는 완벽한 매복지였다. 홍범도 장군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부대를 동쪽 산지의 시루봉에 배치하고, 신민단(新民團) 부대는 남쪽을 맡게 했으며 자신의 본대는 서쪽을 담당하여 완벽하게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6 7일 오전 6시쯤, 일본군이 고려령 골짜기에 다다르자 매복 중이던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고 뒤로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두 번이나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깊숙한 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군은 120명이나 사살됐다. 마침내 일본군 주력부대가 포위망 한 가운데로 들어설 즈음 700여명의 독립군 총구가 불을 뿜었다. 3면에서 가해지는 일제사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일본군은 남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경사가 심하지 않은 동산 방향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뇌우성 속에 홍범도 장군은 신속하게 독립군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이미 전투의 승리는 확실한 결과였고, 일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그친 후 독립군이 전장을 빠져나간 것을 안 일본군은 패배감과 함께 극도의 허탈감까지 겹쳐 감히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야스카와 대대는 야간에 야산지대의 소로를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야스카와 대대는 도중에 때마친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진군하고 있던 다른 일본군 부대인 아리미 대대를 만나게 되었다.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혼이 난 이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지원부대를 독립군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일본군 두 부대는 맹렬히 아군에게 총격을 가했고, 다음날 아침 그것이 오인(誤認)전투였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봉오동에서 2백여 명의 부상자와 함께 15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왔다. 독립군의 피해는 사망 4명에 중상 2명뿐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도 시작일 뿐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국민회가 독립군 부대를 재연합하여 창설한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 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0 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 대첩에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3연대장 최진동(崔振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는 물론 마적과도 싸웠다. 홍범도 장군이 김좌진 등의 부대와 연합하기 위해 청산리로 가던 도중에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많은 전과를 거두었지만, 홍범도 부대 또한 손실을 많이 입었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밀산(密山)지역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조직을 총망라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총재인 서일(徐一)을 보필하였다. 그 후 노령(露領)지역으로 이동한 독립군단은 자유시(自由市)를 근거지로 삼고 소련군과 긴밀한 접촉을 하였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여 수랍스카 부근에 주둔하여 레닌 정부의 협조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그 해 6월 소련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은 무장이 해제되고 독립운동 진영 간 군권 다툼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1922 6월 한국혁명군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브라고에스첸스크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이 조직되자, 홍범도 장군은 최진동, 허근, 안무 등과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3 5월경에는 연해주 이만에서 김좌진, 이청천, 김규식, 안무 등과 함께 조선독립단 군정서의회를 열고 독립군 모집, 무기・군복・양식 등의 보급 및 국내진입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체제가 확고하여짐에 따라 이용가치가 없어진 독립군 간부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다시 여러 방면으로 분산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어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 76세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