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7일

이등휘 대만 총통, 대만 역사상 최초로 미국을 방문

산풀내음 2017. 5. 2. 23:59

1995 6 7,

이등휘 대만 총통, 대만 역사상 최초로 미국을 방문

 

1994 54일 리덩후이(李登輝, Lee Teng-hui, 1923 1월 15 ~ ) 대만 총통을 태운 비행기가 코스타리카로 가던 도중 연료를 공급 받기 위해 미국 호놀룰루 공항에 잠시 기착했다. 여정에 지친 이총통은 호놀룰루에서 하룻밤 쉴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딜 경우 중국이 반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5대 교역국이자전통적 우방인 대만의 국가 원수는 기내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수모를 겪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상원은 즉시 대만 관리들의 미국 방문을 허용하라는 결의안을 제출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무부는 대만 정책을 조심스레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79년 미국이 대만과 단교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949월 미국 정부는 대만과의 통상 관계를 강화하고, 대만의 각료급 관리가 미국을 방문하거나 미국 관리와 만나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의 대만 정책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작은 신호였다. 그러나 그때도 대만 총통의 방미는 허용되지 않았다.

 

리덩후이 총통이 호놀룰루에서 수모를 겪은 지 1년 뒤인 19955월 초 상원은 97 1, 하원은 360 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리덩후이 총통의 방미를 허용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522일 클린턴 대통령은 그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그는 67일부터 6일 동안 모교인 코넬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리덩후이 대만 총통 미국 방문, 코넬대 연설은 6 9.

 

1968년 이 대학에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로서는 27년 만의 모교 방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미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된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대만 총통이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만 입법원(국회) 외교위원회 패리스 장 공동소집위원은 이총통의 미국 방문이 대만 외교의 확고한 승리이며 중국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건이라고 환영했다.

 

그러나 리덩후이 총통은 중국이 대만의 외교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미국 방문이 달나라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고 말함에 따라 미-, -대만간의 갈등이 크게 심화됐다.

 

중국 외교부의 미국 비난 성명 발표를 시작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통해 대만을 위협했으며 또한 미국에 대해서도 주미대사 소환으로 항의했다. 나아가 미국 방문 중인 우진무(于振武) 인민해방군 공군사령관을 즉시 소환했고 6월로 예정된 이귀선(李貴鮮) 국무위원의 방문 계획도 취소하였다.


중국이 이처럼 강력히 반발하는 이유는 미국이 미·중 관계의 기본 틀을 깨려 한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1979년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중국의 대표권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있고 대만은 중국 본토의 한 성()에 불과하다는 데 합의했다. 그 때문에 미국은 대만과 비공식으로 경제·문화 교류는 할 수 있으나, 정부간 교류는 일절 금해 왔다.

 

이 총통의 방미를 성사시키기 위한 대만의 집요한 로비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은 대만 정부가 4∼5년 전부터 미국내 로비 회사를 통해 이총통의 방미를 추진해 왔고 실질적인 경제·문화 관계를 앞세워 상·하원 의원들을 집중 공략했다. 특히 이총통의 방미를 추진해온 코넬 대학은 지난해 대만 정부로부터 2백만 달러를 교수 연구 지원금으로 받은 데 이어 이 총통 측근으로부터 250만 달러를 지원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