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7일

세계 최초 컴퓨터 개발자 앨런 튜링 자살

산풀내음 2017. 5. 2. 23:56

1954 6 7,

세계 최초 컴퓨터 개발자 앨런 튜링 자살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튜링 머신 1937년 세계처음으로 고안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 (Alan Mathison Turing, 1912 6월 23 ~ 1954 6월 7) 1954 6 7일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동성연애가 알려져 풍기문란죄로 기소된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는 '컴퓨터의 발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1946 2월에 공개된 에니악(ENIAC)으로 알려져 있었다. 17천여 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30t짜리 괴물인 에니악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모클리(1907-1980)와 에커트(1919-)가 미육군의 포탄과 미사일의 탄도계산을 하기 위해 발명했고, 에니악은 훗날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역사는 그 동안 일급비밀로 감춰졌던 영국의 콜로서스(Colossus)가 일반에 공개됨에 따라 그보다 먼저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가 1943 12월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Colossus computer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앨런 튜링의 일생에는 그 어떤 과학자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아버지, 세계 최초의 해커, 인공 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을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빼앗아 버렸다.

 

튜링은 1912 줄리어스 매시슨 튜링과 에설 사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인도에서 임신했지만 영국에서 낳기 원해 런던으로 가서 그를 출산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3주 만에 읽기를 배웠으며 계산과 퍼즐에 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데 힘겨워했고, 셰르본느 학교의 교장은 튜링에 대해서 "그는 어떤 학교나 공동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사회성이 아주 부족한 소년"이라고 평했다. 어린 튜링은 그다지 사교적인 소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고, 그의 마음을 받아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튜링보다 한 학년 상급생이었던 크리스토퍼 모르콤(Christopher Morcom)이었다. 1930년 모르콤이 18세의 나이로 돌연 사망했을 때, 튜링이 받은 충격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아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이때를 회상했다.

 

이후 1931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 수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1935 확률론 계산에서 한계중심정리에 관한 학위논문으로 킹스 칼리지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1936 미국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Photo of Alan Turing (far left) with the Walton Athletics Club, probably going to a race meeting in 1946 (Courtesy of the Alan Turing Website)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비밀무기 중에 하나가 바로 에니그마(Enigma)’라고 하는 암호 체계였다. 전쟁의 전략은 사령부에서 작성한다지만 작전은 작전일 뿐 명령과 실전상황이 사령부와 야전 사이에서 원할하게 소통되지 못한다면 군대는 다만 눈뜬 장님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전격전'이라는 고속기동전을 주요 전술로 사용하는 독일군에게 그런 통신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통신을 도청해서 그 작전 상황을 상대방이 낱낱이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바로 암호(cryptography) 기술인 것이다.

 

영국은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최고 두뇌들을 비밀리에 소집했다. 영국은 블레츨리(Bletchley) 파크의 한 농촌 저택에 특별센터를 설치하고, 독일의 암호 해독 작전에 <울트라>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영국 정부와 첩보부는 '에니그마' 분석에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이것이 난공불락의 이 암호체계임을 알게 되었다.

 

블래츨리 파크에 거주하면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당대 제일의 수학자였던 알란 튜링을 포함해서 세계 유수의 암호 해독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암호체계라고 생각했던 에니그마에도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국은 자신들이 알게 된 이런 에니그마의 약점을 이용해 때때로 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점에 항공기를 출동시켜 발생하는 독일측의 암호 전문을 도청하는 형태로 암호 체계의 일부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오독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1943 12월 튜링은 콜로서스(Colossus)라는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2 4백 개의 진공관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높이만 3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공학 판독기에서 해석된 메시지는 5비트(bit) 텔레프린트 코드로 테이프에 천공되었는데, 1초에 약 5,000자를 천공할 수 있었다. 콜로서스는 이렇게 초당 5천자의 암호문이 종이 테이프를 타고 들어가면서 에니그마의 암호와 일치할 때까지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부적으로 콜로서스는 수를 세거나 비교하고, 간단한 산술 연산을 할 수 있는 전자 부속들을 갖추고 있었다. 계산결과는 전기타자기를 경유하도록 설계되었으며, 프로그램은 플러그판의 스위치를 조작함으로써 가능했다. 각 세트는 한 차례에 17,576개의 조합을 점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튜링에 의해 개발된 콜로서스는 독일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의 암호가 영국의 손 바닥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연합국은 독일의 거의 모든 비밀 통신을 도청했고, 연합군의 유럽 대륙 상륙작전의 주요 목표에 대해 독일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칼레'로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전후 튜링은 맨체스터로 옮겨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억용량을 가진 맨체스터 대학 자동 디지털 기계(MADAM)의 부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튜링은 곧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엄청난 연구 성과와 그 동안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기소되고 말았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닥쳤고, 매카시즘은 '빨갱이 사냥'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도 미친 칼날을 들이댔다. 이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 영국 법원은 그에게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렸고, 보석으로 풀려난 뒤 튜링은 집행유예 1년과 일종의 화학적 거세에 해당하는 여성 호르몬 투여를 통한 실험적 치료에 임하라는 의료 처방을 받았고, 1년간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1965 6 8일 그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튜링은 영국정부가 그의 자살 후 20년이 지난 1975년에서야 콜로서스의 사진을 공개했고, 사후 59년만인 2013 12월 24엘리자베스 2 여왕이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튜링의 동성애 죄를 사면하였다. 이어서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