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9일

만해 한용운, 열반(涅槃)에 들다.

산풀내음 2017. 5. 22. 20:00

1944 6 29,

만해 한용운, 열반(涅槃)에 들다.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8월 29 ~ 1944 6월 29) 선생이 1944 6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향년 6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본명이 정옥(貞玉)인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법호인 만해(萬海)와 법명인 용운(龍雲)으로 더 친숙하다. 충청남도 홍성 출생인 그는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4살이 되던 해인 1892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189416세의 나이로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당시 만해 선생은 불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1896년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간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설악산 오세암(五歲庵)

 

이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순력하였다. 190527세 때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 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40세 되던 1918년 월간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유심지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으나 불교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

1919 3·1독립운동이 있었는데,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5년 만해 선생은 설악산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고 이듬 해인 1926년 간행하였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와 선을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를 순화된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외세의 질곡에서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을 님을 통한 사랑으로 어루만지면서 무집착, 무분별의 절대평등의 불이(不二)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52세 때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당시 불교 관련 잡지,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조선불교월보, 조선불교총보, 불교진흥회월보, 불교, 신불교, 조선불교, 금강산, 금강저.

 

1931 53세의 나이에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21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다음 해에 딸 영숙이 태어나고 1933심우장을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석방 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1940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만년에는 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말년에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였지만 병원 진료를 거부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후 19446월 29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승랍 49, 세수 66세로 사망하였다.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주역들 뒷줄 우측 두 번째가 최범술·김법린·허영호. 앞줄 우측 첫 번째가 김상호이고, 네 번째가 강유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만당의 주요 구성원은 총 24명이지만 전체 당원은 8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중앙에 본부를 두고 주요 지방에 지부를 두었으며, 동경에 특수 지구를 두었다고 한다. 초기 만당의 결성은 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30 5월경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등의 1차 결사가 있었고, 이들의 검증을 거쳐 2차로 입당한 승려는 조은택, 박창두, 강재호, 최봉수였으며, 3차로 박영희, 박윤진, 강유문, 박근섭, 한성훈, 김해윤 등이 합류하였다.

만해 한용운의 얼이 스며있는 심우장. 조선총독부와 마주보지 않기 위해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강직함을 알 수 있는 몇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느날 한용운이 친일 주지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에 우연히 참석하여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주지들은 모르겠다고 했고 한용운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하지만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건 송장입니다. 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썩어가는 송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다. 흥미가 동한 주지들이 귀를 기울이자 한용운은 단상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외쳤다.

"바로 여기에 모인 네놈들이다!"

 

2) 한용운은 1919년 만세운동에서 민족대료로 함께 했던 하지만 이후 친일파로 변졀한 최남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고 후에 최남선이 찾아오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 저입니다. 육당(최남선의 호)이 왔습니다."

"육당이 누구요?"

"아니? 선생께선 이 육당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선생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1919 2.8 독립선언 주도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참여한 독립운동가였지만 1939년 이후 창씨개명 동참 권고등 친일파로 변절한 이광수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하루는 그의 집인 심우장에 젊은 시절의 이광수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행동을 잠시 관찰하더니 "네놈은 나라를 배신할 인물이니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마라!"하고 일갈하면서 내쫓았다고 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