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산풀내음 2017. 5. 22. 20:17

1995 6 29,

삼풍백화점 붕괴

 

와우아파트 붕괴(1970)에서부터 신행주대교 붕괴(1992),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1993),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풍백화점 붕괴(1995),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공사현장 붕괴(2000), 이천 물류창고 붕괴(2005) 그리고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2014) 등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부실공사는 끝을 모르고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1995년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502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낳은 대형참사로, 천여 명이 사망한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 붕괴사고(2013) 전까지 세계 건물 붕괴사고 사상 최다사망 사고였다

 

 

1995 6 29일 오후 5 57분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5층 건물 2개동 북쪽(정문에서 왼쪽) 건물이 불과 20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 사고당시 백화점안에는 고객 1천여명과 직원 5~6백명이 있었다. 백화점 건물은 폭격을 맞은 듯 폭삭 가라앉아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으며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돼 밖으로 튀어 나오는 등 현장주변은 아비규환을 이뤘다. 사고현장은 콘크리트 잔해와 철근 구조물이 수북이 쌓였고 파편이 인근 법원건물에까지 튀었다. 결국 502명이 사망, 937명이 부상을 당하고 6명이 실종돼 총 1445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마지막 생존자’ 박승현()은 건물 잔해 틈 속에서 17일 동안 버틴 끝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리고 최명석() 11일만에 유지환() 13일만에 구조되었다.

 







최후의 구조자 3,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삼풍백화점 건물은 며칠전부터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이날 오전 일찍부터 4층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부실설계, 부실시공에 의한 품질사고로서 사고원인이 매우 복합적이었다. 설계와 시공만 부실한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의 부실, 기술을 무시한 건축주의 독선, 부정부패와 뇌물관행을 기본으로 한 건설업계의 비리 등 총체적인 부실의 결과였다.

 

삼풍백화점은 첫 삽을 뜨기 이전부터 각종 의혹이 무성했다. 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원래 강남의 노른자위 아파트지구로서 대형 판매시설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각종 의혹 속에 상업용지로 지구지정 변경과 건축승인이 이루어지고, 백화점도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지상 4층 일반상가로 허가받은 건물을 건축주인 이준 회장이 5층 백화점으로 바꾸려 할 때, 서초구청과 서울시청 담당 공무원들에게는 뇌물이 건네졌다. 또 삼풍백화점은 설계도면부터가 잘못된 건물이었다. 관계기관에 제출한 허가도면과 실제 공사 때 쓰인 시공도면이 달랐다. 설계와 감리를 맡은 우원건축은 확정되지도 않은 시공도면을 공사 도중 틈틈이 채워 넣기도 했다. 이후 5층으로 증개축을 할 때 우성건설이 무리한 요구를 거부하자, 이준 회장은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삼풍건설산업으로 시공사를 변경했다. 부실시공은 계속 이어졌다.

 

삼풍백화점 붕괴를 사전에 경고한 이들이 있었다. 시설관리 노동자들과 5층 식당 관계자들, 인근 주민들은 균열과 이상 징후를 느끼고 제보하거나 문제제기했다. 백화점 시설부 회의에서도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필요성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95년을 삼풍백화점의확장원년으로 결정한 경영진의 방침에 가로막혀 그 주장은 묵살되었다.

 

6 29, 사고 당일 옥상은 내려앉았고 기둥엔 금이 가고 물이 샜다. 사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경영진은 심각한 균열현상을 보고받고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그 누구도 매장 폐쇄를 주장하지 않았다. 경영진은 결국보수공사를 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영업을 계속하라고 결론 내렸다.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진은대담했다. 사이렌은 울렸지만 안내방송은 하지 않았고, 붕괴직전에 자신들만 대피했다. 게다가 사고 직후 이준 회장은백화점이 무너진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피해도 되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진 것이라는 망언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이들 경영진에 대한 처벌은 너무 미약했다. 건물이 붕괴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객들만 남긴 채 먼저 대피한 삼풍백화점 경영진의 행위는 살인에 가까웠지만 실제 이들은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준 회장 등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기소하기 위해서는 이 회장이 ‘건물이 곧 붕괴될 것 같다. 고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을 입증해야 했지만 이를 증언할 유일한 사람인 이영철 시설부장이 참사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업무상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돼 76월의 형을 선고 받았다. 이준 회장은 이후 만기출소했다.

 

삼풍백화점 시설이사였던 이영길씨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등으로 금고 2, 백화점 설계 및 구조계산을 맡은 건축설계사 임형재씨는 금고 3, 기초공사를 맡은 우성건설 건축주임 정순조씨와 삼풍건설 현장소장 이평구씨는 각각 금고 1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왼쪽부터 이영길 시설이사, 이한상 사장, 학수 구조기술사, 그리고 최소한 다들 묵념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이준 회장.

이준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7 6개월을 복역한 뒤 2003 4월에 출소했지만, 원래 있던 지병인 당뇨병 고혈압이 심해진데다가 감옥에서 신장병까지 얻어 출소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도 신장투석기를 달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신장 기능이 약해져 거의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출소한 지 6개월만인 2003 10월에 죽었다. 향년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