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일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독립협회 창립

산풀내음 2017. 5. 30. 21:06

18967 2,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독립협회 창립

 

아관파천(1896 2 11 ~ 1897 2 20)으로 인하여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지자, 조선조정은 근대 문물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조정은 대중계몽에도 관심을 두어 서양 문물에 밝은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896 47일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 지식층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이들은 신문을 통하여 민중들에게 자주 독립을 역설하고, 근대적 민권사상을 전파하였다.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그 해 7 2일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서재필 선생과 독립협회 임원들

 

독립협회는 본래 관료들의 사교 단체로,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로 출발했다. 처음 서재필은 회장직이나 위원장직을 고사하다가 이완용전라북도관찰사로 나가면서 회장직을 떠맡게 되었다. 설립 초기 독립협회는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명하여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6 11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인 모화관(慕華館)을 개칭한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다.

 

영은문(영은은 맞을 영()과 은혜 은()을 써서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과 독립문()

독립문 완공 직후 모습. 독립관 주변으로 초가들이 있고, 독립문 뒤로 인왕산이 둘러 처져 있다

 

1897 중반부터 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 주관하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독립협회는 러시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모했고, 이완용 등 친러파는 대거 협회를 떠났다.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며 약 4천명의 회원수를 가진 단체가 되었다.

 

만민공동회의 모습, 최초의 정치집회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1897 10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한다. 한편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 11월 1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토론을 거친 후 투표에 부친 결과 만장일치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는 조선왕조 500년 사상 유일무이한 일들에 나서기 시작한다. 민중이 중심이 되어 대신들을 탄핵한 것이다. 의정부 참정 조병식, 내장원경 이용익 등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고 조병식은 만민공동회에 편지를 보내서 해명까지 했음에도 끝내 여론에 밀려 면직당했다. 크게 고무된 독립협회는 1898 2월부터 본격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하여 같은 해 10 28일부터 11 2일까지 정부로부터 국정개혁의 약속을 받기 위해 종로에서 대신들을 참석시키고 '관민공동회'를 개최했다. 특히 1029일에는 사회 각 층의 1만여 명이 모인 군중대회에서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6개조를 결의했다.

 

독립협회는 헌의6조를 통해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가진 군주주권국가를 확립하되, 서구의 상원의회와 같은 기구로 중추원을 설립하여 왕권의 자의적 사용을 견제하고자 했다. 또한 갑오개혁 때 추진되었던 재정기관의 탁지부로의 일원화, 재판제도의 확립 등 여러 개혁조항의 전면적 실시를 요구했다. 정부도 헌의6조를 받아들여 유명무실했던 중추원을 의회적 기능을 갖는 기구로 개편하고, 중추원 의관의 반수인 민선의관 전원을 독립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189811 조정의 중신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하였고, 정부의 외곽단체인 황국협회 역시 독립협회의 황제 폐위설과 공화정 수립설을 유포시킨 뒤 이를 근거로 이상재, 윤치호, 남궁 등을 탄핵하여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었다. 독립협회는 회원을 총동원하여 체포된 17인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통해 황국협회를 지지하는 천여 명의 보부상들을 동원, 한성에 불러들여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 수천 명은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흥분한 민중은 정부 대신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어 정부에서는 황국협회와의 충돌을 문제 삼아 1898 독립협회의 해산을 건의한다.

 

1898 11 민중들의 정부 대신 탄핵에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협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12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다. 그 후 협회는 1년여 간을 더 존속하다가 1899 12 해산되었다. 독립협회에서 개설한 만민공동회1900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