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일

샘 월튼, ‘월마트’ 1호점 개점

산풀내음 2017. 5. 30. 21:13

19627 2,

샘 월튼, ‘월마트’ 1호점 개점

 

 

샘 월튼(Samuel Moore "Sam" Walton, 1918 3월 29~1992 4월 6)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잡지를 팔거나 신문배달을 하는 장사꾼 기질을 보였다. 대학 졸업 후인 1940 6월 아이오와주 디모인의 한 상점에 견습생으로 취직해 뛰어난 판매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기질과 무관하지 않았다.

 

월튼은 1945 9월 자신의 돈 5,000달러와 장인에게 빌린 돈 2만 달러를 투자해 아칸소주의 소도시 뉴포트에 있는 벤프랭클린 잡화점을 매입한 뒤 소매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벤프랭클린 잡화점은 프랜차이즈 상점이었는데도 월튼은 독자적으로 가격을 할인하는 영업 전략을 폈다. 직접 제조업자들을 만나 물건을 싸게 사들여 박리다매를 추구한 덕에 개업 5년이 될 무렵에는 아칸소주에서 최고 매출과 이익을 내는 소매상점이 되었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되는 것을 본 건물주가 임대계약 만료와 함께 계약을 해지해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가게를 잃고 만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뉴포트를 떠나 새 가게를 얻은 곳이 바로 아칸소주의 낡고 초라한 시골도시 벤톤빌의 자칭 ‘1호점이다. 샘 월튼에게 뉴포트는 뼈아픈 교훈을 준 곳이자 잊고 싶은 과거다.

 

월튼은 1950 7월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한 월튼스 염가판매점을 열어 바로 벤톤빌 상권을 장악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한 상점에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새로운 상점을 열었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상품을 직접 제조하기도 했다. 2인승 비행기를 구입해 직접 비행기를 몰고 새 상점 터를 물색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 덕에 1950년대 말에는 미국 최대의 잡화점 경영자가 되었다.

 

샘은 우연한 기회에 연간 2백만 달러 매상을 올리는 미조리주의 대형백화점을 둘러보고 자신이 경영하는 16개 잡화상의 연 매출 150만 달러와 비교하게 됐다. 같은 시기 1960년대 초부터 미국에는 K마트, 울코, 타겟을 비롯한 할인점(Discount Store)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잡화점의 성장한계를 느꼈고 언젠가는 대형할인점과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미래를 직감했다. 그는 버틀러 형제를 비롯한 몇몇의 큰 가맹점 주인들(Franchisors)과 만나 할인점 동업을 구상했으나 한결같이 거절당했다.

 

샘은 그의 전 재산을 걸고 독립적으로 라저스에 대형할인점(18천 평방피트) 건물을 세운 뒤 1962 72일 소득수준이 낮고 인구도 5,000명이 채 안 되는 같은 아칸소주의 로저스에 월마트 1호 점을 열었다.

 

The first War-Mart

Flyer for the grand opening of the first Walmart, 1962

 

시행착오를 느끼며 2년 후 계속 2호 점, 3호 점을 세웠다. 경쟁자보다 20% 싸게 파는 박리다매 원칙으로 사업을 펼쳐나갔다. 5년 후인 1967년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자리를 잡은 K마트는 250개의 점포를 열고 8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때, 월마트는 인구가 1만 명도 안 되는 작은 지방에 고작 19개의 점포로 매상이 9백만 달러를 넘었다. 샘은 항상 경쟁사들의 점포를 방문해 경쟁사들의 구매방법, 인벤토리, 가격, 상품진열, 점원들의 손님 접대방법 등을 수첩이나 녹음기에 담아 와서 연구하는 등 사업개선에 노력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중고 픽업트럭에 애견을 싣고 새벽 2~3시부터 야간 근무하는 종업원들을 만나 격려해 주었다. 먼 곳은 경비행기를 직접 조정해 종업원들을 방문했다. 그는 저공비행으로 경쟁업체들의 위치, 인구밀도, 교통량 등을 직접 관찰해 위치선정을 연구한 뒤 새 점포를 세워나갔다.

 

샘 월트의 생전 고백이다.

만약 그들(K마트)이 그 때 우리를 덮쳤어도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마을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들로서는 이 작은 마을까지 와서 경쟁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성장할 수 있는 10년간의 유예기간을 줬고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켜냈다.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깨어났을 때는 세상이 바뀌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소매 유통업계의 판도가 역전됐다. 그들이 우리 뒤에 처졌다.”

 

 

당시 할인점의 선두주자는 K마트였다. K마트가 대도시 매장의 업그레이드에 주력하는 동안 월튼은 IT시스템을 도입,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매장의 현금등록기에서 사무실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전사적인 네트워크망을 구축하고 컴퓨터에 기반을 둔 판매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자체 인공위성을 띄워 미 전역의 배송상태와 전 세계 산지 가격 동향을 체크했다.

 

1977 K마트는 약 1천개의 대형 점포로 성장했고 월마트는 고작 150개밖에 안되었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샘은 K마트와의 직접적인 경쟁을 피해 작은 도시 위주로 점포를 세웠다. 1979 230번째의 점포를 개장, 매상을 10억 달러 이상 올렸다. 1982년 빅K(Kuhn’s Big K Store)를 인수, 미 남부지방에 있는 빅K 점포를 연간 100개 이상씩 월마트 점포로 바꿔나갔다. 그는 1983년 프라이스 클럽(Price Club, Costco)을 모방해 샘스클럽(Sam’s Club) 1호 점을 열고 9년 후 217호 점을 개점, 연간 100억 달러 매출을 올렸다.

 

 

1980년대 후반 샘에게 인생 최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큰 도시에서 살던 중산층들이 교외로 빠져나가 큰 도시에 점포를 가졌던 막강한 경쟁사인 K마트가 문을 닫기 시작했고 덕분에 월마트는 급성장했다. 샘은 1990 1,528개의 점포를 열고 260억 달러 매출에 10억 달러의 이익을 낼 수 있었다. 1992년 사망 직전엔 미 전역으로 뻗어나가 연간 430억 달러의 매상을 올리고 있었다.

 

1985 10월 미국의 경제전문지포브스는 샘 월튼이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발표했다. 상품을 만들지 않고 단지 상품을 팔기만 하는 상인이 그것도 도매상이 아닌 소매상이 최고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에 기록될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3차 산업이 1차 산업을 추월하고 유통산업이 제조업을 휘두르는 신시대의 개막이었다.

 

하지만 정작 월튼 자신은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억만장자가 됐을 때도 그가 즐겨 입는 옷은 월마트에서 파는 50달러짜리 상의와 16달러짜리 바지가 고작이었다. 죽기 전까지 비행기 3등석을 이용했고 픽업 트럭을 직접 몰고 다녔다. 1호점에 전시된 그 트럭의 시트는 가죽도 아닌 천이고 바닥 깔개에는 구멍이 나 있다.

 

월튼은 후손들이 물려받은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것을 경계해 근검절약을 가르치는 자서전도 남겼다. "다시 태어나도 소매상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월튼은 1992 45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샘 월튼은 엄청난 재부를 쌓았어도 전혀 부자인 척, 그리고 잘난 척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비판적 견해도 있다. 샘은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의 재산을 부인, 형제, 자식들에게 분배했고 사회환원은 전 재산의 1% 미만에 불과했다. 그는 종업원들을 사업동료(Associates)라고 부르고 최저임금(시간당 7달러 이하)을 지급하는 세계 최대의 소도매 회사를 남겼다. 그의 이익분배 방법이란 최저임금의 5% 정도 가치의 월마트 주식을 15% 할인해 장기 근무한 사업동료들에게 주는 것이다. 극소수의 장기근무자들은 20년 후 월마트 주식의 붐을 타고 25만 달러 이상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업원들은 빈곤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직장을 찾아야 했다. 현재 2백만 명을 넘는 종업원들은 학생, 은퇴한 노인, 불법 이민자들을 포함해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술능력이 전혀 없는 빈곤층이다. 종업원은 입사 첫날부터 고객을 웃음으로 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샘 월튼은 자신의 자서전 ‘Sam Walton, Made in America, My Story’에서 자신의 성공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년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멋있는 구상이 떠올라 월마트를 세웠고 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월마트 1호점은 1945년부터 우리가 해오던 일의 자연스러운 산물이었고 또 다른 하나의 실험이었을 뿐이다.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성공이라 생각되는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 월마트도 2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