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6일

러시아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 처형

산풀내음 2017. 6. 10. 07:26

1918716,

러시아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 처형

 

1894 26세의 나이로 로마노프 왕조 제18대 황제가 된 니콜라이2(Nicholas II, 1868 5월 18 ~ 1918 7월 16) 1917 3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흐느낄 겨를도 없이 왕관을 빼앗겼다. 니콜라이2세는 그 후 우랄산맥 중턱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구 스베르들로프스크)의 한 외딴집에서 유폐(幽閉)생활을 했다.

 

 

한밤중에 무슨 사진을 찍는다는 거야?’

갑작스러운 명령에 일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지하실로 내려가 두 줄로 나란히 섰다. 이들이 달아났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지하실에 들어선 사람은 사진사가 아니라 무장한 병사 10여 명이었다. 누구인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간단한 처형명령서가 낭독된 뒤 총알이 난사됐다.

 

Death of the Family of Emperor Nicholas II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장소가 너무나 좁았기 때문이다. 좁은 방에서 모든 총이 동시에 불을 품었기 때문에 연기가 방에 꽉 찼다.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물론 장병들까지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몇 명이 구토를 해대자 장병들은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무엇에 쫓기는 듯 서두르던 장병들은 희생자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트럭에 옮기기 시작했다. 처형장에서 트럭까지 희생자들을 옮기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 가량. 그 동안 처형 책임자인 유로프스키는 현장을 비웠다. 그가 다시 현장에 돌아왔을 때 처형에 동원된 장병들 중 몇몇이 희생자들의 보석을 훔쳐서 도망간 것을 알았다.

 

문제는 희생자들을 매장 장소까지 옮길 트럭이었다. 트럭은 50마력도 되지 않는 1.5톤의 소형인 피아트였는데 과적에다 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을 달렸기 때문에 엔진이 과열돼 중간에서 멈췄다. 자동차에 큰 문제점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로프스키는 트럭의 짐을 줄이기 위해 희생자 중 일부의 시신을 내려놓고 예상된 매장 장소로 떠났다. 그런데 내려놓은 시신 중 한 명이 막내딸이었는데 그녀가 살아 있었다는 주장이 후에 제기되었다.

 

1918 7 16일 밤 (17일 새벽이라는 주장도 있음) 우랄 지방 예카테린부르크 근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4(또는 3)의 딸과 14세인 알렉세이 황태자는 이렇게 처형됐다. 3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로마노프 왕가도 14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894년 부황 알렉산드르 3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군주로서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천성이 소심했고 지적인 자질은 거의 없었다. 좋아한 것은 그저 군대의 제복과 계급장, 행진 같은 것뿐이었다. 1894년에서 1917년까지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했던 그였지만, 개혁과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조국의 뜻을 탄압할 만큼 그리 강력한 제왕은 못됐다.

 

Nicholas II (right) with Alexei (left), his 13-year-old son

 

사실 니콜라이 2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황태자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자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파계 성직자인 라스푸틴(Grigori Rasputin, 1869-1916) 대부분을 라스푸틴에게 넘겨버렸다. 차르의 신임을 등에 업은 라스푸틴은 1903년부터 권력을 장악해 분리파 정교회와 유대인들을 비롯한 많은 종교 세력을 탄압했으며, 시위중인 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황실의 재물을 횡령하고, 부정부패와 수많은 추문을 저질렀지만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에게 현혹돼 이 사태를 방관하기만 했다.

 

라스푸틴(1872-1916). 그는 의사이면서 예언자이었다. 니콜라이2세를 현혹시켰고 이는 몰락의 전주곡이 되었다.

 

그러던 1905 1 22일 일요일,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몰락을 초래하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급료인상을 청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행진하던 수십 만 명의 자국민 시위대에게 총격과 포격을 가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수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분노한 민중들은 대규모 파업과 2,700회에 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이 대규모 혁명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황실의 권위와 도덕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모습이 돼버렸다. 니콜라이 2세는 이후에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위해 1,500만 명을 징병했지만,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230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력과 물자가 크게 낭비돼 러시아의 경제 상황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된다.

 

더 이상 폭정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파탄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은 결국, 1917년에 2월 혁명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2세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자신의 군대까지 혁명에 가담하자 결국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난다.

 

그의 유골은 1989 4월 한 희곡작가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70여 년 동안 인근 개천가 진흙탕 속에 그대로 내버려져 왔다. 유골더미에서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세 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가 유전자(DNA) 분석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황태자 알렉세이와 막내딸 아나스타샤의 유골은 DNA 분석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떠돌던 아나스타샤의 생존설을 부추겼다.

 

일찍이 아나스타샤를 자처하는 이는 여럿 있었다. 애나 앤더슨이라는 여자가 가장 그럴듯했다. 앤더슨은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러시아 황실의 유산 상속권을 요구하는 소송까지 벌였고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4년 과학자들이 치아와 머리카락의 DNA를 분석한 결과 앤더슨은 니콜라이 2세의 딸이 아니라 프란치스카 샨츠콥스카라는 이름의 떠돌이 폴란드 여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