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6일

미국 최초의 원폭실험(트리니티 실험) 성공

산풀내음 2017. 6. 10. 07:33

19457 16,

미국 최초의 원폭실험 성공

 

1945 7 16일 오전 530분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미국정부가 2차 대전 중 비밀리에 추진한 암호명 `맨해튼계획 (Manhattan Project)`의 결실이었다. 섬광은 400km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됐고, 굉음은 80km까지 울려 퍼졌으며, 버섯구름은 12km 높이까지 치솟았다.

 

최초의 핵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Trinity Test)으로 생긴 버섯구름


World's First Atomic Bomb

Major General Leslie Groves andRobert Oppenheimer at the Trinity shot tower remains a few weeks later. The white overshoes were to prevent the trinitite fallout from sticking to the soles of their shoes.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9 8, 연합군은 스파이를 통해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위협을 느낀 페르미와 실라르드는 동료인 아인슈타인을 설득했고,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맨해튼 프로젝트를 발동했다.

 

『각하. 최근 저는 페르미, 실라르드와 주고받은 연구 필사본들을 살펴본 결과, 머지않아 우라늄이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예측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렇게 우라늄으로 만든 폭탄은 극도로 강력한 폭탄이 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 중』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 정부가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합심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민관 합동으로 구성된 군사 부문은 맨해튼 지구(Manhattan District)라 불렸고, 전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공식 이름은 대체 자원 개발(Development of Substitute Materials)이었다. 프로젝트 명 ‘맨해튼’은 공식 명칭을 대신하기 위한 미국 측의 암호명이었던 셈이다.

 

1942 9월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오펜하이머와 시카고대의 엔리코 페르미를 중심으로 원폭개발을 위한 연구실-실험실-제조실이 건설됐으며 1943년에는 영국 리버풀대의 핵물리학연구소장 조셉 롯블랫 박사팀도 합류했다.

 

맨해튼 계획은 1939년에 극소수(처음 예산은 6천 달러였다)로 출발하였지만 1945년에는 고용 인구 13만 명, 사용 예산 2억 달러(인플레이션을 감안한 2011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44천만 달러가 된다[1])로 성장하였다. 비용의 90% 이상은 공장의 건축과 핵분열 원료의 구입에 사용되었고, 10% 정도는 무기 개발에 사용되었다. 연구 개발과 제조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 있는 30곳 이상의 지역에 분산되어 진행되었고, 일부는 기밀 지역이었다.

 

Albert Einstein and Leo Szilard working on the famous letter

A selection of US and Canadian sites important to the Manhattan Project

From 1943 until 1945, Grand Junction, Colorado was the center of the Manhattan Projects secret effort to mine and refine uranium ore from surrounding mills in the Colorado Plateau.

 

 

전쟁 기간 동안 두 종류의 핵폭탄이 개발되었다. 하나는 우라늄-235를 탄두로 사용한 포신형 핵분열 무기,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 가운데 0.7%를 차지하는 우라늄-235를 농축하여 탄두로 제작한 것이다. 우라늄-235동위 원소우라늄-238과 원자량이 거의 같기 때문에 이 둘을 분리하여 농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핵탄두의 제조 공정은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공정과 캘루트론(Calutron)이라 불린 동위 원소 분리 공정, 그리고 기체확산법과 열연동을 이용한 우라늄-235의 농축 공정이 있었다. 이 공정들은 대부분 테네시 오크리지에서 이루어졌다.

 

또 다른 종류의 핵폭탄은 플루토늄을 탄두로 사용한 것이었다. 플루토늄은 워싱턴주의 핸포드 사이트에 있는 반응로에서 만들어졌다. 플루토늄의 제법으로는 우라늄-238중성자를 조사(照射)하는 핵 전환이 사용되었다. 핵 전환으로 생성된 플루토늄은 화학적 분리 방법으로 농축되었다. 한편, 폭탄의 개발 및 제작은 뉴멕시코 에 있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진행되었고, 포신형 보다 복잡한 내폭형으로 설계되었다.

 

An aerial view of the Hanford B-Reactor site from June 1944.

 

관련 인원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보안 유지는 어려운 일이었다. 계획의 보안 유지를 위해 방첩대가 운용되었다. 1943, 소련이 맨해튼 계획의 기술을 빼내려 한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서부 방위 사령부 소속의 방첩대에 근무하던 보리스 T. 패쉬 소령은 오펜하이머의 추천으로 버클리 대학교의 방사선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하콘 체발리어가 소련에게 정보를 전달했다는 것을 적발하였다. 소련에 가장 큰 정보를 넘긴 첩보원은 영국 측 요원으로 로스앨러모스에서 핵심 분야에 근무하던 클라우스 퍼치스였다. 클라우스 퍼치스의 간첩행위는 1950년에 폭로되었고, 이것은 미국, 영국, 캐나다 사이의 핵협력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외에도 헨리 골드,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에델 로젠버그줄리어스 로젠버그 등이 첩보원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조지 코바와 같은 다른 첩보원들은 전후에도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기도 하였다. 소련은 이렇게 모아진 정보들을 바탕으로 소비에트 핵폭탄 계획을 앞당길 수 있었다.

 

1945 7월 16 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 실험이 진행되었다. 실험 이후 두 종류의 핵폭탄이 만들어졌다. 이 프로젝트로 제조된 무게 4,082Kg, 길이 3m, 지름 0.72m, 위력 TNT 15천 톤의 일명 `리틀보이(포신형 핵폭탄)` `팻맨(내폭형 핵폭탄)`으로 불리는 2개 원자폭탄은 다음달인 8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돼 한 순간에 모두 20여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두 도시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B-29

Little Boy explodes over Hiroshima, Japan, 6 August 1945 (left); Fat Man explodes over Nagasaki, Japan, 9 August 1945 (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