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6일

`다리`誌 필화사건 무죄판결

산풀내음 2017. 6. 10. 07:45

19717 16,

`다리`誌 필화사건 무죄판결

 

1971 716, 월간 `다리`() 필화사건에 연루된 윤형두(주간), 윤재식(발행인), 임중빈(평론가)에 대해 1심 선고에서 목요상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문제의 논문은 북괴를 찬양, 동조, 고무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 정의가 실현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의 ‘민족일보’ 사건(1961)을 서막으로 하여 이 땅에 빚어진 필화를 대충 열거해보면 이러하다. 조선일보 리영희 기자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사건(1964), MBC사장 황용주의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 사건(1964), 작가 남정현의 소설 ‘분지’ 사건(1965), 동양통신의 ‘군기’ 사건(1968), 신동아의 ‘차관’ 기사 사건(1968), 김지하의 담시 ‘오적’ 사건(1970), 시인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사건(1975), 한승헌의 ‘어떤 조사’ 사건(1975), 월간 ‘다리’지 사건(1971), ‘민중교육’지 사건(1986), 세 언론인의 ‘보도지침’ 폭로사건(1986) 등이 형사문제로까지 번진 사례들이었다.

 

감옥이나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더라도 연행, 입건 또는 일시 구속된 사례는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형사처벌과는 달리 행정조치로 폐간 당한 경우도 있으니 ‘사상계’ 사건(1970)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상계’는 1953년 장준하 주도하에 창간된 종합 월간지로서 지식인과 학생층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으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월간지가 5·16 후의 군정 연장, 굴욕적 대일외교, 부정부패 등을 격렬하게 반대하자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특히 함석헌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은 국민들에게는 큰 깨달음을, 쿠데타 집권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거기에다 1970 5월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싣자 그 작자는 물론 발행인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을 당하는 등 탄압을 받던 끝에 ‘인쇄시설 미비’라는 이유로 정부가 1970 9 29일 잡지사의 등록을 취소함으로써 끝내는 폐간되고 말았다.

 

그 뒤, 정론지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 ‘사상계’지를 대체할 만한 월간지의 출현을 대망하는 공론이 일어났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뜻 있는 몇 사람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온 잡지가 바로 월간 ‘다리’였다. 이 잡지의 간행에 필요한 자금은 정계의 현역 국회의원인 김상현(1935 - )이 대고 운영은 범우사(출판사) 사장 윤형두가 맡기로 했다.

 


1986 9 12일 직선제 개헌,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10일째 단식농성 중인 김상현 의원.()

 

1970 9월에 창간된 다리는 박정권의 서슬에 눌려 인쇄소를 무려 20여 차례나 바꾸는 등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행부수가 6만부를 넘길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김지하의 풍자시와 희곡이 실렸고 한승헌, 김동길씨 등 쟁쟁한 논객들이 참여해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1970 11월호 『다리』에는 문학평론가 임중빈의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1971 2 12, 중앙정보부는 이 글을 문제 삼아 필자 임씨는 물론이고, 그 잡지의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 두 사람까지 구속했다. 서울형사지법의 공안사건 영장 담당인 유태흥 부장판사가 발부한 구속영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극좌파 학생운동인 68년의 파리 5월 혁명에 의한 드골 정권의 타도와 미국의 극좌파인 뉴레프트 활동의 타당성 등을 전제하면서,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문화혁명을 통한 정치혁명에로의 길만이 학생운동의 정도이며, 무엇보다도 능동적 참여를 통한 변혁이 필수의 것으로 요청된다고 논단하여 은연중 우리 정부의 타도를 암시,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고 두 윤씨는 이를 알면서 게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거론한 프랑스의 콩방디나 미국의 뉴레프트 등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널리 소개된 바여서, ‘은연중 북괴를 이롭게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일부 언론이나 식자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에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조짐은 여러 면에서 드러났다. 문제의 필자 임중빈은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의 전기를 집필 중이었다. 다리를 발행하는 범우사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용 간행물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자(사장)가 바로 윤형두였다. 또 다리 발행인 윤재식씨는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잡지의 고문이자 자금 지원자이기도 한 김상현 의원은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다 1971 4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대선 경쟁자 쪽에 대한 탄압이 분명했다.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간신히 김대중 후보의 도전을 따돌리고 3선에 성공하였다.

 

1971년에 있었던 제 7대 대통령 선거,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53.2%)가 김대중 후보(45.2%)를 누르고 당선

지역감정 문제가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선거로, 김대중은 처음으로 소위 "호남 소외론"을 내세워 당시 상황적으로 발전이 더디던 호남 지역의 지역감정적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박정희 측에서는 "신라 대통령론"과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영남(특히 경북)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도 나타났다. 다만, 김대중 또한 60년대에 지역감정을 이용한 바가 있어, 지역감정의 형성은 어느 한 쪽만의 책임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아직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지역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7대 대선 직후에 치러진 8 총선의 경우 호남( 21 : 13)이 오히려 영남( 26 : 24)보다 여당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지역감정이 총선에까지 두드러진 것은 13 총선부터이다.

 

여기서 다리지 필화사건의 의미 있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판사들의 소신 있는 판결이다. 그것도 1심뿐만이 아니라, 1974 5월의 대법원까지 3연속 무죄판결이 났다. 특히 1심 판결이 내려진 날은 1971 7 16일로 박정희가 이미 4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상황이었다.

 

‘다리’지 사건 1심 법정에 선 피고인들, 오른쪽부터 임중빈, 윤형두, 윤재식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는 목요상 판사

공판장을 나와서 환하게 웃는 임중빈, 윤형두, 윤재식

 

1971 7 17일자 조선일보는 1심 재판부의 판결 이유를 이렇게 전했다.

"임 피고인이 논문에서 프랑스의 5월 혁명, 미국의 뉴 레프트 등 서구 학생운동을 인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활동, 주의, 사상을 찬양, 고무, 동조했다고 볼 수 없으며 독자적인 청년문화운동으로 역사적인 난관을 타개해보자는 일종의 청년문화론을 시도한 것이지, 현 정권 타도를 위한 문화혁명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볼 수 없다."

 

이처럼 용기 있는 판결을 한 사람은 바로 목요상 판사였습니다. 물론 그로서는 일생을 건 판결일 수밖에 없었다. "고위층에서 관심이 많은 사건"이란 압력에서부터 "잘못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란 협박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험악해 지자 판결문도 친구의 집에서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을 하니 검사가 찾아와 판결을 선고할 것인지에 대해 묻기에 기록도 집에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판결을 할 수 있겠나?’라고 둘러대고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중정 요원이 판사실을 수시 방문하여 '높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는 등의 발언을 하는 등 다소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동 사건 재판과정에서 각종 접대를 제의하는 한편, 판결 내용을 사전 제보해줄 것과 당시 피의자들의 보석 신청을 기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2007년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 목요상 증언>

 

한승헌 변호사는 한겨레를 통해 다리지 필화 사건에 대한 사법부 판결을 이렇게 평가한다. "군사 정권 아래서는 일찍이 보기 힘든 반공법 무죄판결"이었으며, 그래서 "우리나라의 사법을 되돌아보는 특강이나 글에서 목 판사의 용기와 수난을 우리 사법()의 명맥을 살린 자랑스러운 실례로서 언급한다"….

 

다리지 필화사건은 1971 7월 제1차 사법파동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목요상 판사도 이것을 계기로 법복을 벗게 되었다.

 

목요상(睦堯相, 1935 9 9 ~ )은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 정치인이다. 11·12·15·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