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시작

산풀내음 2017. 6. 16. 22:33

19467 25,

좌우합작위원회 시작

 

1946 7 25일 오후 2시 반 서울 덕수궁 석조전 2층 대형홀에서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과 국민당 당수 안재홍, 한민당 총무 원세훈 등 우익 측의 유력인사 5명과 인민당 당수 여운형, 민족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 등 좌익 측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좌우합작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좌우합작은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대립이 심화되고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시작됐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자 우익은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벌였고, 좌익은 민족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 찬탁운동을 전개했다. 한민당의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다가, 1945 12 30일 새벽 6 15분에 우익활동가 한현우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45 12월 말 우익의 반탁 집회. 친일파가 반탁 투쟁에 적극 가세해 매국노, 민족 반역자에서 갑자기 애국자로 둔갑했다.

1946 1월 좌익의 모스크바3상회의 절대 지지 집회.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1946 3월에 제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소련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지지 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주장이었고,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에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주장 등으로 나뉘어 서로 입장 차이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6 6월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 발언을 하였고, 이에 대해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단독정부 수립 규탄 대회를 하는 등 국내에서는 좌, 우익세력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중도파 세력들은 좌, 우 대립이 계속되어,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려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결국은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1946 7 25,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하게 된다.

 

좌우합작위원들과 함께. 앞줄 왼쪽부터 안재홍, 김붕존, 김규식. 8.15이후 미.소 냉정구도가 남긴 민족분단상황에서 대화를 통한 소통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10 7일 합작 7원칙을 발표한다.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이 맞서 있던 두 달간의 교착상태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공식적 합의 사항을 생산해낸 것이다. 7원칙에 대한 실질적 합의는 10 4일에 이뤄졌고, 준비를 거쳐 7일에 김규식과 여운형의 공동 성명 형태로 발표한 것이다.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 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당시, 좌우합작 7원칙 내용 중 '3조 토지개혁' '4조 친일파 청산'이 가장 주요한 내용사안 이었는데, 이 원칙에 대해 일부 세력은 강하게 반발하여 좌우합작운동에 비난하기도 했었다. 발표 당일 이승만은 기자단과의 회견 중 7원칙에 대해 "나는 무조건으로 이를 지지하고 과거 5개월 동안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켜왔다. 그러나 좌우 합작이 최초의 조건대로 방금 진전 중인지 자세히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반대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으면서도 반대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한편, 한독당은 같은 날 "민족적 양심과 민족적 열의로 보아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라며 전면적 지지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여운형의 인민당은 공식 발표 전날인 6일 확대위원회를 열어 7원칙 지지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여운형에 반대하고 박헌영 노선을 추종하는 인민당내 ‘48인파는 당의 결정을 배격한다는 성명을 당일 발표하였다.

 

좌우합작 7원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이 좌우합작에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군정이 주선한 우익계열만의 정치개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군정은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중도파 정치인사 여운형김규식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군정의 개입과 간접적 지원에 탄력을 받아 1946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구성되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47 5 21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맞춰 활기를 띠는 듯 하던 좌우합작위원회는 1개월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면서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침을 전환하자 큰 타격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7 7 19일 여운형 마저 암살되자 12월 들어 위원회는 해체를 결의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민족의 단결을 통해 정치적 난관을 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진행되어 온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파가 존재할 수 없는 첨예한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의 일부 단결에 그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47 8 3일 거행된 여운형 장례식 장면. 여운형은 12번 테러를 당하다 1947 7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으로 암살되었다.

1947 12, 좌우합작위원회 해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