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5일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발표

산풀내음 2017. 6. 16. 22:42

19697 25,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발표

 

1969 1월에 등장한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붕괴된 대외 정책에 대한 국내적 합의 기반을 다시 형성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새로운 대외 정책의 기조는미국의 정치적 및 군사적인 후퇴와 국제 체제에서의 미국의 적절한 조화가 가능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었다. 후에 닉슨 독트린으로 명명되는 괌 독트린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시아-유럽 7개국 순방을 위해 괌에 도착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전 이후의 아시아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1969 7 25일 발표했다.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맡아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한 것이다.

 

 

백악관 수행기자단 앞에서 닉슨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견지해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미국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는 지킨다.

② 동맹국이나 기타 미국 및 기타 전체의 안보에 절대 필요한 국가의 안정에 대한 핵보유국의 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이 핵방패를 제공한다.

③ 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책임을 져야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④ 군사적 개입도를 줄인다.

 

참석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바로 몇 시간 전 태평양 해상의 항공모함 호닛 함교에서 열린 아폴로 11호 승무원 귀환 환영 행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닉슨 역시 자못 고무된 상태였다. 미국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함으로써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제칠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닉슨의 이날 발표는 베트남전에서 입은 심각한 피해를 반영한 것으로 아시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닉슨은 1970 218 `197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나타내는 외교특별교서를 발표함으로써 닉슨 독트린을 확정했다.

 

닉슨 독트린으로 베트남 파병국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파병했건만 철수와 관련해서는 파병국들한테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 또한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한국, 타이, 필리핀군은 더 이상 베트남에 주둔할 명분이 없었다.

 

삼국의 또 다른 고민은 자국에 주둔하는 미군 문제였다. 한국과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타이는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미군한테 군사기지를 양여하고 있었다. 3국에 있는 미군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한국은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정전 상태였고, 1960년대 말까지 북한의 경제 상황이 남한보다 더 나은 터였기 때문에 안보를 위해 미군의 주둔이 필요했다. 타이는 베트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쟁터가 된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필리핀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지만, 내부 공산 게릴라의 활동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군 주둔의 또 다른 역할은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해외의 미군은 주둔을 위한 대부분의 물품들은 본국으로부터 공수했지만, 일부 품목은 주둔지로부터 조달했다. 미군 주둔 지역의 정부들은 미군에게 더욱 많은 군수품을 조달함으로써 경제적 효과를 누리기 위해 미군 쪽과 다양한 형태의 교섭을 벌였다. 이에 더하여 주둔 미군 자체의 씀씀이도 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969 4월에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는 닉슨을 만나 향후 2~3년 동안 베트남에 계속 참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으며,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군대 배치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던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닉슨 독트린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다. 1969 821일이었다. 닉슨은 한국은 예외 지역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 계획이 있을 경우 사전에 한국 정부에 그 일정을 알려주고 베트남에서의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1969 1124일자 닉슨이 키신저에게 보내는 비망록에 따르면 닉슨은 박정희를 만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주한미군의 규모를 줄이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970 320일 키신저는 주한미군 2만 명을 1971년 말까지 철수시키는 문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국무부에 지시했다. 주한미군 감축 정책이 한국 정부에 전달되자마자 박정희는 같은 해 420일 주미한국대사를 통해 타자가 아닌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그만큼 한국 정부는 다급했다.

 

닉슨은 박정희의 편지를 받은 지 사흘 만에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8개월 전에 했던 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지난 몇 년 동안 빛나는 성장을 거듭해서 북한을 앞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군의 규모가 과거 10년간 가장 큰 규모로 성장했다는 점, 그리고 박정희의 편지에서 언급된 1949년의 완전 철수와는 달리 주한미군의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만이 감축되는 것이며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주둔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강조되었다. 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 의지를 더욱 다졌으며 국군현대화계획(율곡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1969 8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박정희(연단 왼쪽)와 닉슨이 공식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닉슨은 한반도에서의 미군 감축과 철수 가능성을 일축했고, 박정희는 미국 정부가 철수를 요구할 때까지 베트남에 한국군을 주둔시키겠다고 말했다. 닉슨은 곧 말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