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5일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

산풀내음 2017. 6. 16. 22:37

19567 25,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

 

아직 사람들은 사상 최악의 해상 재난 사건은 1912년의 타이타닉 호 침몰로 알고 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세계 5대 해상 재난 사건에도 끼지 못한다. 당시 타이타닉 호에는 수많은 상류층 인사들이 타고 있었고,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 소유의 선박이었던 관계로 유독 타이타닉만 해상 재난 사건의 대명사로 부각됐다. 역사상 최악의 해상 재난 사고는 1945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있었던, 9000명 이상이 죽은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 호 침몰 사건이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독일 나치 정권이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약 2000석 규모의 초호화 관광 여객선이었다.

 

 

이와 반대로 사고로 배는 침몰하였지만 충돌 당시 충격으로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조되어 세계 해양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난 구조 사건으로 꼽히는 것이 아드레아 도리아호(SS Andrea Doria) 사건이다.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뉴욕시로 가는 거대한 이탈리아의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는 1956 7 25일 밤, 낸터킷섬 남쪽에서 안개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많은 승객들이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깨어 있던 사람들은 안개를 헤치고 또 다른 배의 빛이 나타나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11 10, 스웨덴 정기선 스톡홀름호는 일직선으로 도리아호의 측면을 들이받았다. 충돌 당한 29백만 달러의 이탈리아 호화선 도리아호는 충돌 12시간 후 수심 225피트의 대서양에 침몰했다. 스톡홀름호는 선수가 찌그러진 채로 해안경비정의 인도를 받아서 항구로 이동했다.

 


 

그것은 공해상 일어난 최초의 대형 선박들의 충돌사고로 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두 배 모두 최신형으로서, 항해용 레이더와 다른 안전 장치들을 갖추고 있었다. 도리아호의 선체는 특히 11개의 방수 칸막이로 나누어져 그와 같은 충돌을 견뎌내도록 건조되었다. 타이타닉호의 선주들처럼, 그 배를 건조한 사람들도 그 배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 재난 이후, 일주일간 계속된 법정증언에서 양측은 서로 사고를 내게 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상충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서쪽으로 항해하던 도리아호의 선장 피에로 칼라마이는 그 배를 감싼 짙은 안개가 염려되어, 규칙적으로 안개 경보를 울렸다. 한편 스톡홀름호는 뉴욕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통상 동쪽으로 항해하는 배들이 사용하는 항로에서 수 킬로미터 북쪽을 항해하고 있었다. 스톡홀름호는 안드레아도리아호를 에워싼 안개를 우연히 피하게 되어, 맑은 하늘 아래에서 항해하고 있었다.

 

각각의 배는 서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때 레이더로 다른 배의 접근을 보고 있었으며, 칼라마이선장은 상대 배에 좀더 공간을 주려는 생각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두 배가 육안으로 보일 만큼 접근했을 때, 서로 충돌할 위험에 처한 것이 분명해졌다. 양측 모두 상대방이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상대방이 자기들의 항로 안으로 곧장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진상이 어떠했든 간에, 스톡홀름호와 도리아호가 충돌하는 순간 불꽃이 튀고 쇠가 충돌하는 굉음이 일어났다. 그 순간 이탈리아 여객선 안의 승객들은 큰 진동을 느꼈고, 이내 탈출이 시작되어 밤새 지속되었다. 충돌로 인해 배 측면에 구멍이 생겨 바닷물이 억수같이 밀려들었다. 선체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침몰하였다.

 

그러나 근처에서 항해하던 선박들의 즉각적인 조치와 사람들의 용기로 안드레아 도리아호의 이야기는 해양사에서 가장 위대한 해난 구조의 전설이 되었다. 도리아호에서 재난 구조신호가 나가자, 모든 방향에서 배가 나타나 구조에 나섰다. 도리아호에서는 46명의 승객이 사망했으며 스톡홀름호의 승무원 5명도 사망했지만, 1660명의 승객은 그날 밤,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최고의 승리를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