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30일

백건우ㆍ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산풀내음 2017. 6. 22. 20:17

19777 30,

백건우ㆍ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윤정희(尹靜姬, 본명: 손미자(孫美子), 1944 - )1967년에 영화 ‘청춘극장’에 데뷔하였고 이후 7년 동안에 무려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 절정에 올랐다. 1974년에 서강대학교 총장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소르본느 대학교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알게 된 피아니스트 백건우(1946 ~ ) 1976년에 화백 이응노(1904-1989)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백건우 윤정희 부부는 화백 이응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인경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이응노와 박인경(1926~) 부부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한국으로 압송된다. 징역3, 자격정지 3,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풀려난 뒤 이들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조촐한 결혼

신혼의 윤정희와 백건우

 

그런데 1977 7월초 박인경이 윤정희 부부에게 접근하여,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거부가 고령의 부모를 위해 음악회를 열고자 하는데 백건우를 초청한다는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초청장의 내용은 721일자로 된 초청장의 내용은 白씨의 음악을 듣게 되어 기쁘다는 것과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쇼팽 등을 듣고 싶으며 白씨 가족은 물론, 朴仁京씨도 초청, 경비를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파블로비크는 이 초청장에서 음악회는 고령의 자기 부모를 위한 것인데 그들이 유고 자그레브 교외의 별장에 살고 있다고 했다.

 

1962년 폴 파케티 화랑 개인전 때 초청 인사들과 함께 한 이응노(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박인경(왼쪽에서 세 번째)

 

두 달 후로 예정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연주회 준비로 바빴던 백건우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박인경의 말이 백건우룰 추천한 자기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고 하여, 하는 수없이 초청에 응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사실 박인경은 연주회 초청 이전에도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고 이들에게 두 번이나 제안을 했었으나 부부는 거절했었다.

 

1977 7 29,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그들의 생후 5개월 된 딸과 박인경이 파리에서 비행기로 취리히에 갔다. 공항에 내리니 파블로비크의 비서라고 하는 여자가 대기하고 있다가, 초청자의 노부모가 현재 유고의 자그레브 근교 별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비행기를 갈아타고 자그레브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백건우는 비자 없이 자기들이 어떻게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로 갈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 비서라는 여자의 말이 초청자가 이미 입국수속을 하였다고 대답하면서 취리히발 자그레브행 왕복비행기표를 건네주었다. 그때 윤정희는 생후 5개월 된 딸을 위하여 요구르트를 사러 갔는데 그사이에 박인경과 그 비서라는 여자가 자리를 옮겨 흰 봉투 하나를 박인경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여비서는 취리히에 남고 백건우와 윤정희와 그들의 딸과 박인경이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자그레브 비행장에 도착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그런 지방도시 작은 비행장에 조선민항이라고 쓰여진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띄었고 저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여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유독 그 여자만 어울리지 않게 썬 그라스를 썼고 흰 저고리에 검정색 동강치마를 입고 있어서 전형적인 북한여성의 옷차림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목격한 윤정희는 대단히 불안하였고 긴장하였다고 한다. 윤정희의 예감이 맞았다. 그녀는 북한공작원 허묵과 함께 백건우, 윤정희 납치공작에 참여한,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의 3등 서기관 이상준의 처인 방화자이었다.

 

그때 백건우가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박인경이 취리히에서 그 여자비서로부터 받은 흰 봉투를 주었다. 봉투 속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그 집을 찾아가는 약도, 그리고 유고 돈 800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거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를 초청해놓고 마중도 나오지 않고 택시를 타고 오라니 그런 결례가 어디 있나. 백건우는 이상한 예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자그레브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한적한 시골 길을 15분 가량 달린 뒤, 3층 집 앞에 도착했다. 행인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택시 요금은 2백 디나르가 나왔다연주회를 한다면 방문객들도 많이 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들도 마당에 주차되어 있어야 하겠는데 주위가 너무 조용하였다. 수상하다고 느낀 백건우는 아내와 딸을 택시 안에 남겨두고, 박인경과 함께 나와 주변을 살피다가 박인경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2층에 만찬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백건우가 따라 들어가 보니 1층은 방문이 모두 잠겨있고 창문도 커튼이 내려진 상태였으며, 2층에는 갑부가 마련하는 만찬이라고 믿기 어렵게 과일접시 하나와 빈 접시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3층에서 자기를 초청한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남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순간 백건우는 그가 북한공작원임을 직감하고 쏜살같이 택시로 달려갔다. 그 동양인은 “wait, wait" 를 연발하며 따라오고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거의 택시의 문손잡이를 잡을 정도로 접근하였다. 백건우는 그 택시를 타고 급히 그곳에서 빠져 나와 자그레브에 있는 미국영사관으로 달려갔다. 그자가 바로 북한공작원 허묵이었다.

 

그때가 1977 7 31일 오후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미국영사관의 문은 닫혀있었고, 도서관이 아직 열려있어 백건우 가족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마침 잔무정리를 위해 남아있었던 ‘크리스텐슨’이라고 하는 미국외교관이 백건우 가족을 만나 사정이야기를 들었다. 크리스텐슨은 즉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임시로 묵고 있는 호텔로 안내한 후 자정 무렵에 4 416호실로 옮겼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누가 416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박인경이 호텔 청소부가 왔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백건우가 급히 제지하고 크리스텐슨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크리스텐슨이 그가 묵고 있던 3층에서 4층으로 올라왔을 때 거기에는 동양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416호실 앞에 서 있었다. 그 중 한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며칠 전 오스트리아 건국기념일 리셉션에서 보았던 북한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허묵이었다. 크리스텐슨은 즉시 백건우에게 전화하여, 지금 북한사람들이 문밖에 와 있으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북한사람들이 사라진 후에 크리스텐슨이 나와서 백건우 일행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안내하고 파리 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여 저들이 탑승하고 이륙하는 것까지 확인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서 지적된 박인경의 미심쩍은 행동은 다음과 같다.
① 연주회 초청을 주선했다는 여자에 대해 “파리에 사는 사람이며 아주 친한 사람” 이라고 했다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모르며 서너 번밖에 만난 일이 없다” 며 분명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

② 초청장이 처음엔 우편으로 보내져 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서라는 여자가 두고 갔다고 번복했는데 비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③ 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의 여비서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러 갈 때 박인경이 따라가, 백씨 부부가 안보는 데서 자그레브 별장의 약도와 돈이 든 봉투를 받았다.

④ 자그레브 공항 도착 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백건우가 두리번거리자 박인경은 봉투를 내주면서 “택시 타고 오라는 말인가 봐. 택시 타고 가자” 라고 말했다.

⑤ 별장 도착 후, 빈집을 앞장서 올라갔다 나오면서 “만찬회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올라가 봐” 라고 말했다.

⑥ 미국 영사관으로 가면서 “이 일을 크게 벌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자” 고 말했다

⑦ 미국 영사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말이 없어지고, 미국 공보관장이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호텔에 그냥 있자고 했다.

⑧ 북한 사람이 호텔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내가 가볼까” 하면서 문을 열어주려는 것을 백씨 부부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⑨ 백건우가 한국대사관에 가서 신고를 하자고 하자 “나는 프랑스 정부와 손잡고 살 수 있다” 면서 거절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후인 1977 8 31, 윤·백 부부가 서울로 왔다. 부부는 중앙정보부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이것으로 납치 미수 사건 수사는 종결되었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이응노 화백의 국내 전시회를 금지시키고 작품 유통을 막았다. 이후 이응노, 박인경 내외는 1983년 한국 국적을 버리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들은 1987,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이응노 화백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이 화백은 1989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박인경은 납치 사건 발생 17년 만인 1994 1월초,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 화백 5주기 展에 첫 입국한 후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1996, 金正日의 본처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은 자신이 쓴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 동아일보사(1996)』에서 윤, 백 부부 납치는 평양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밝힌다. 1997년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이한영은 이 납치 사건에 박인경이 개입됐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이 납치미수사건 후 26년이 지난 2003년에는 북한이 이 납치공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그레브가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신생국가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이 문서는 현재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행정위원인 도부리보예 비디치가 북한대사 정광순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정광순 대사가 해명한 내용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 납치시도 사건은 현지주재 북한외교관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평양에서 직파한 공작팀의 소행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