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0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강제 폐간

산풀내음 2017. 7. 5. 20:31

1940 8 10,

동아일보, 조선일보 강제 폐간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제11회 올림픽이 열렸다. 손기정과 남승룡이 출전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은 89, 서울 시간으로 밤 11시에 시작됐다. 10일 새벽, 세계 인류의 꿈이었던 30분 벽을 깨고 2시간29192로 손기정이 1위로 골인했다는 감격적인 소식이 들어왔다. 825일자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감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 스포츠’를 뒤늦게 입수해 거기에 실린 사진을 복사하여 전재한 것이다그런데 초판 때는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였으나, 놀랍게도 재판에서는 원본과 달리 유니폼 가슴 부위의 일장기가 교묘히 삭제되어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는 꼼꼼하게 기록한 스크랩북을 남겨 다시 한번 투철한 기자정신을 ...

 

일장기 말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32년 김은배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6위 입상할 때도 눈에 거슬리는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는 총독부의 트집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그 때와는 사뭇 분위기는 달랐다. 결국 이튿날 서울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향후 6년간 저지를 조선 압살 정책의 첫 제물로 동아일보에 8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이 줄줄이 연행되었고, 송진우 사장 등 많은 인물들이 강제로 사직하게 되었다.

 

 

일제는 1937 7 7일 북경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 침략의 포문을 열은 것과 동시에, 조선인을 대륙침략에 동원했다. 황민화 운동, 조선어 교육 폐지에 이어 1940년에는 창씨개명까지 강행하면서 유례없는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1937년 ‘일반검열기준(一般檢閱基準)’을 만들어 언론탄압 고삐를 한층 단단히 죈 총독부는 1939 6월 다시 ‘편집에 관한 희망 및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이로써 검열기준은 자의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되었고 폐간도 어느 때나 가능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제 4차 정간은 11개월 만에 풀렸지만 이후의 검열 강화 등 다양한 형태의 간섭으로 정상적인 신문제작이 불가능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938 2월에는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모든 신문은 ‘조선춘추회(朝鮮春秋會)’라는 어용단체에 가입해야 했다.

 

1939 9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일제는 조선인의 황민화를 모토로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 나갔고 결국 11월부터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본의 자진폐간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자진폐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40 1 15일 총독부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불러 자진 폐간에 응한다면 총독부가 전 사원에게 1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윤전기 등 인쇄시설을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두 신문이 말을 듣지 않자 총독부는 7월 들어 용지 통제권을 발동하여 신문 용지 배급량을 줄였고 신문사 간부들을 연행하여 폐간을 종용했다. 결국,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8 10일 일제의 폐간령에 따라 폐간계를 낼 수밖에 없었다. 두 민족지의 폐간으로 조선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일문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만이 남게 됐다. 20년 만에 다시 우리 신문 없는 언론 암흑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동아일보는 1940 8 11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에 또 새 싹이 트고 꽃 위에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라는 의미심장한 폐간사를 끝으로 최종호를 발행하고 12일 해산식을 가졌다. 울음바다 속에 백관수 사장은 “죽음 속에서 생을 구합시다. 그리고 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을 믿읍시다.”하고 인사말을 했다. 전 사원에게는 위로금조로 2년치 급료가 지급됐다. 다른 것은 다 매각해도 사옥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남겨두었고 사옥관리를 위한 법인인 ‘동본사(東本社)’를 1943 1월에 발족했다. 그리고 폐간 5 4개월 만인 1945 12 1일 복간되었다.

 

본보는 자못 돌연한 것 같으나 금 810일로써 소여의 보도 사명에 바쳐오던 그 생애를 마치게 되었으니 오늘의 본지 제6819호는 만천하(滿天下) 제독자위(諸讀者位)에게 보내는 마지막 지면이다.…그러나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1940 8 11일자 동아일보 폐간사

 

조선일보는 회사의 목적을 변경하여 대중 의료사업을 경영하고 동방문화학원(육영재단법인, 기금 1백만 원)에 사옥과 기지를 기부하되 `조광`, `여성`, `소년`은 계속 발행한다고 밝혔다.

 

강제 폐간 뒤 사원들은 동아일보 사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1940 8 10일 조선일보 폐간호 제작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