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0일

박태환,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 남자 자유형 금메달

산풀내음 2017. 7. 5. 20:38

2008 8 10,

박태환,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 남자 자유형 금메달

 

열 아홉 살의 박태환이 올림픽을 제패했다. 박태환은 8 10일 베이징 국립아쿠아틱센터(워터큐브)에서 벌어진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선에서 1964년 한국 수영이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이후 한국 수영 사상 올림픽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4186의 기록으로 중국의 장린(34244), 미국의 라슨 젠슨(34278) 등을 제치고 1위로 터치패드를 찍었다. 반면 라이벌인 호주의 그랜트 해켓은 34384 6위에 그쳤다. 특히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은 아시아 수영 사상 최초다.

 

박태환은 전날 세운 자신의 최고 기록인 34335 149 앞당겼다. 9일 예선에서 새롭게 수립한 장린(중국)의 아시아 신기록(34332)도 갈아 치웠다. 하지만 이안 소프가 보유하고 있는 세계기록(34008)에는 조금 못 미쳤다.

 


 

1989 927 11남 중 둘째로 태어난 박태환은 천식을 앓던 5세 때 동네 수영장을 다니면서 수영을 처음 접했다. 수영에 재능을 보인 박태환은 7살 때 노민상 수영대표팀 총감독을 만나게 된다. 항상 호흡을 조절해야 하는 수영에서 장거리를 주종목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폐활량이다. 보통사람이 4천㏄정도 인데 반해 박태환의 폐활량은 그의 2배가 되는 7천㏄나 된다. 색소폰 주자였던 아버지 박인호씨의 영향을 받았다.

 

폐활량이 크고 몸이 비지방성이다 보니 몸이 물에 뜨는 부력도 보통 선수에 비해 훨씬 낫다. 물 위에 더 많이 뜨니 자연스럽게 저항을 덜 받게 되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박태환의 키(1m82)는 서양의 라이벌들에 비해 10㎝ 안팎이 작지만 대신 가슴 두께가 얇고 엉덩이가 작아 전체적으로 굴곡이 적다. 경주용 보트나 서핑 보드처럼 물의 저항을 덜 받는 체형에 균형이 잡힌 영법이 장점이다.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거듭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태환은 대청중학교 3학년이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전체 한국 선수단 최연소 선수였다. 그러나 예선에서 출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물에 뛰어 들어 실격 당하는 시련을 맞았으나 그 해 11월 박태환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국제수영연맹(FINA) 경영월드컵 (쇼트코스)자유형 1500m에서 준우승하며 자신의 기량을 세계에 나타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6 도하 아시 게임부터였다. 아시안 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200m, 400m, 1500m에서 금메달을, 자유형에서는 100m 은메달, 남자 계영 400m, 800m, 혼계영 400m 동메달을 획득하여 한국에서 오랜만에 수영 영웅이 나타났다고 언론에서 떠들어 댔으며, 2007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자유형 400m에서 헤켓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국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수영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 아시아 신기록), 200m에서 은메달(+ 아시아 신기록)을 획득하면서 완전히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획득하였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자유형 예선에서 오심으로 인해 실격이 되어 결승에 올라가지 못할 뻔 하였으나 실격취소를 판정 받아 안 좋은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자유형200m400m에서 은메달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2014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린  제 17 아시안 게임 남자 100m 자유형에서 은메달을, 남자 200m 자유형, 남자 400m 자유형, 남자 400미터 계영, 남자 800미터 자유형, 남자 400미터 혼계영 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여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6개의 메달을 획득하였지만, 아시안게임 이전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인 네비도를 투약한 것으로 드러나 인천아시안게임에서 획득한 모든 메달이 박탈되었다. 징계기간은2014 9 3일부터 2016 3 2일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