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4일

중앙정보부, 인혁당사건 발표

산풀내음 2017. 7. 8. 21:40

1964 8 14,

중앙정보부, 인혁당사건 발표

 

1964년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점차 박정희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권이 63일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8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획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다'라는 발표문을 낭독했다. 이를 통상 1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이라 부른다.

 

김형욱이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간첩 김영춘은 1962 1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하여 인혁당 조직을 주도한다.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었던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 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도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한다. 이후 조직을 확대해 오다 1964 4월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중앙상임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며 동시에 학생데모를 4월 혁명같이 발전케 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41명이 구속된 이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검사는 95일 증거불충분으로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공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검찰총장 신직수는 당직검사 정명래를 통해 이 가운데 26명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대해 이용훈은 서울지검장 서주연에게 기소하기 어렵다는 것이 공안부 의견이라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서주연은 기소도 못하면 대대적으로 발표한 정부의 위신이 뭐가 되느냐며어떻게든지 해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용훈도 공안부 검사 네 명이국가안보적 견지에서 사건 수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여 수사했는데, “어떻게든지 해보라는 말씀은 증거가 없어도 기소하라는 말씀이냐고 따졌다. 이용훈이 지검장이 검찰총장에게 보고할 수 없다면 자신이 직접 보고하겠다고 하자, 서주연은 애원조로 다시 어떻게든 해보라고 당부했다.

 

구속 만기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831일 이용훈은 검찰총장 신직수에게공소제기를 하여도 유죄를 받을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직수는 몇 달 전까지 중앙정보부에 차장으로 있던 몸이었다. 다음날 그는 법무부에서 장관 민복기, 차관 권오병, 담당 국장, 대검 차장, 서울지검장 등 고위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다시 한 번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권오병이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피의자들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 정보부에서 자백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공소제기를 해도 되지 않겠소?”라고 강하게 말했다. 이용훈도 흥분해차관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관님께서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시면서 학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십니까?”라고 받아 쳤다. 결국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 김병리 검사, 장원찬 검사, 최대현 검사는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육사8기로 1963 4대 중앙정보부장에 올라 제1차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등을 주도하는 등 박 정권에 헌신했지만 1969년 박정희에게서 버림을 받음. 그 뒤 유신 후반에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며 마찰을 빚다가 제8중앙정보부 김재규의 꾐에 의하여 1979 10월 7파리에서 실종)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 전주사범학교, 육군법무관 출신으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함. 사법고시 출신이 아님에도 36세의 나이에 검찰총장이 되었으며, 인혁당 사건 당시 김형욱과 함께 사건 조작을 주도함.)

 

1964 8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인민혁명당 41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64 910 <동아일보>는 인혁당 사건 담당검사인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전원이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기소 이후에도 인혁당 사건을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26명이 중앙정보부에서 나체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다는 사실과 사건 조작설이 퍼지자 검찰은 재조사에 나섰다. 14명은 공소취하로 석방됐다. 도예종 등 12명과 이후 추가로 구속된 1명 등 13명이 반공법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65 1, 서울 형사지법이 피고인 13명 중 도예종, 양춘우 2명을 제외하고 박현채 등 11명 피고 전원에게 무죄선고를 내림으로써 무리한 기소였음이 확인됐으나, 이어진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이 원심을 파기하고 13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도예종, 양춘우, 박현채 6명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고, 5명은 징역 1 집행유예 3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2심에서의 형이 확정되었다.

 

한편 3년 형이 확정된 도예종은 10년 뒤 되살아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끝내 죽음으로 내몰렸고, 사건 관련자 김배영은 1962 10 일본으로 밀항하였다가 일본 경시청의 수배를 받자, 1964 11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하여 월북하였다. 그는 이후 1967 10,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1에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배영의 사형이 집행된 후 3년이 지난 제2차 인혁당재건사건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자금은 월북한 김배영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